치메타를 떠나 호기롭게 하이킹을 시작한 지 4시간이 흘렀다. ‘너희들은 이곳에 무조건 가야 해!’ 라고, 강력하게 추천한 파트너(그는 일주일 전 동일한 루트를 걸었다)의 말을 듣고 덥석 산장을 예약한 J 말에 따르면, 목적지인 산장에 도착하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이었다. 티치노 알프스의 심장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험난했다.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해 약 1시간 후 도착한 트로자 정상(Coma della Trosa)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이토록 맹렬한 얼굴의 알프스를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트로자의 표식인 거대 십자가 앞에서 불경을 읊으며 하루의 안녕을 기도했는데, 그것이 산의 신을 노여워하게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신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반대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확실한 건 한 발 한 발 허용하는 산의 길을 따라 신중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연민의 파도가 나를 덮치도록 두지 말아야 한다.’
생각하면서, 동시에 생각하지 않으면서, 좁아터진 능선의 가파른 길을 오르고 내리고 더듬거리고 기었다. 이쪽 능선 너머에서는 청명한 푸르름이 3D처럼 겹겹이 선명한데, 저쪽에서는 차오르는 바람을 타고 새하얀 구름이 밀려왔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산골짜기를 뱀처럼 휘감던 구름, 말로야 스네이크를 떠올렸다. 니체는 실스마리아의 구름을 보고 ‘영원한 변화 속 영원한 회귀’를 보았고, 나는 영원한 변화와 회귀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기로 했다. 나아가 오늘은 죽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피로의 무게가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양똥구리였다. 우리에겐 소똥구리라 알려진 딱정벌레가 양똥을 실어 나르는 중이었다. 엄지손톱만 한 딱정벌레가 아직 수분이 남아있는 양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태국 왕궁의 실내장식에 쓰인 수백 만 마리의 비단벌레처럼 빛나는 초록빛이 신비롭게 아름다웠다. 손바닥에 올려 햇살을 비추자 등껍질이 보석처럼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한국에서는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어 환경부가 한 마리에 1백만 원을 주고 수집한다는 뉴스를 본 적 있다. 이 귀한 딱정벌레가 알프스 능선에 지천이다. 험준한 산자락에서 고대 암반을 뚫고 사는 개미와 딱정벌레는 알프스 생태계를 지탱하는 최하위 군집이다. 내가 이 가파른 절벽에서 추락해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에 떨어진다면, 이 작은 딱정벌레가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해 산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나의 일부는 딱정벌레가 되겠지.
흰색 바탕에 파란색 줄무늬가 칠해진 표식은 알파인 트레일로 숙련된 하이커에게 적합한 어려운 구간이다. 때때로 철제 구조물을 붙잡고 미끄러운 암릉을 오르고, 지의류가 붙은 암석 더미를 점프하듯 올라 아찔한 경사면을 가로질러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고난의 구간이 나올 때마다 거의 울 지경이었는데, 눈물 대신 다소 민망할 정도의 못난 표정으로 붉으락푸르락했다. 늘 앞서가던 J가 몸을 돌려 카메라를 들 땐 선글라스를 신속하게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려움과 원망, 짜증과 공포가 뒤섞인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못난 얼굴이었다. 고산 트레일은 굉장히 독특한 풍경을 보여주었는데, 산의 일부가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채석장에서나 보았을 은백색 화강암이 층층이 부서져 마구잡이로 쌓여 있거나, 파도에 쓸린 듯 경사면에 흩어져있었다. 발로 힘껏 내려쳐도 단단하게 뿌리내린 암석이 대부분이지만, 거대 바위들이 천둥소리를 앞세우며 우르르 무너져 추락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구름 속에서 바위 크레바스를 옆으로 건너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런 순간마다 불경을 읊고 자기 최면을 하며 온갖 혼잣말을 해댔다. 나는 오늘 죽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쯤이면 산양을 한 번 볼 만도 한데요. 어디선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을지 몰라요.”
J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양 한 마리가 절벽 한쪽에서 푸닥거렸다. 아슬아슬한 절벽 높은 지점의 동굴 앞이었다. 베테랑 클라이머답게 경사면의 작은 돌뿌리를 내딛고 서서 우리의 움직임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동굴 앞에서 흰갈색 줄무늬가 호기심 있게 움찔거렸다. 잘 생긴 뿔 2개가 전사의 칼처럼 늠름했다. 한편으로는 우리를 그저 바라보고 있음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천길 낭떠러지를 총총걸음으로 겨우 지나고 있는 우리에겐 작은 충돌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이곳에 우리의 숨만 있지 않다는 것, 수많은 생명의 시끄러운 존재들이 함께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백색의 노두가 그대로 드러난 대암석은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고,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린 형태로 길고 긴 고갯길로 이어졌다. 고도 1,900m 지점에서 우린 다소 짧은 구간인 알파인 트레일을 오를 것인지, 멀리 돌아가는 길을 걸을지 결정해야 했는데, 나는 당연히 능선이었다. 균형을 잃으면 바로 추락할 수 있는 알파인 트레일은 오직 선택받은 자만 통과가 가능하다.
“괜찮아요?”
J의 질문에 줄곧 당찬 목소리로 괜찮다고 대답해 왔지만, 이젠 후들거리는 종아리와 발바닥 통증을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몰랐다. 발바닥 굳은살이 돌 위에서 밀리고 또 밀리면서 살과 살 사이에 균열을 만들고 통증이 밀려왔다. 발바닥이 몸을, 땅을 제대로 지지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는데, 그만큼 속도가 느려졌다. 해가 밤 9시까지 떠 있는 스위스 여름에 이곳에 온 것이 다행이었다. 또한 J의 늠름하고 탁월한 운동감각에 사뭇 놀랐다. 수년 전 나는 그녀와 북한산을 오른 적 있는데, 고도감에 질려 주저앉고 울먹거리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 건축가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시간 날 때마다 알프스 하이킹을 즐긴다고 했다. 미래의 몸을 예측하려면, 현재의 몸을 보면 된다. 나는 내 미래의 몸에 작은 희망을 품는다. 내 몸은 변화할 것이다.
“우리 산장이야! 다 왔어! 이제 세 고개만 넘으면 되는 거야!”
2,167m의 고도를 넘고 구불구불한 고개를 몇 개 지나는 동안 우리는 산장이라 믿을 수밖에 없는 작은 집들을 발견하고 방방 뛰며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힘을 끌어모아 다다른 장소에는 깃발 달린 돌탑이, 허물어진 산장이, 그리고 숫양이 엎드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돌 오두막이 있었다. 나는 어느새 말을 잃었다. 이대로 콱 쓰러져 헬기로 구조되길 바랐다. 하지만 언제나 산에서는 선택권이 없다. 산이 허락한 만큼, 주어진 길을 묵묵하게 가야 할 뿐이다. 축축한 물바위를 지나 작은 폭포를 건너 부슬비가 쏟아지는 바람골을 가로지르며 까다로운 지형을 통과했다. 온몸의 중심을 온전히 내 두 발바닥에 두었다. 발바닥이 숨 쉬고, 엄지발가락이 방향을 제안했다. 나의 뇌는 쪼그라들었는데, 두 발바닥은 제 갈 길을 갔다. 마치 가야할 곳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먼 곳에서 산양 무리가 무심한 눈빛을 응시하며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것이 보였다. 사방에 땡그랑거리는 종소리가 우아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터질 것 같은 종아리를 부여잡고, 천근 같은 발걸음을 하나 둘 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초록 능선에 흩어져 있는 양들 너머로 목적지인 니미 알프 산장이 보였다. 19세기에 지어진 석조 구옥 앞에 산양 목장과 알프스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이름도 니미.. 라니. 똑같이 욕이라도 시원하게 하고 싶었으나 목소리는 그저 입 안에서 웅얼거리고, 구름 앉은 산장은 아직 까마득했다. 영원히 닿지 않을 풍경처럼.
기다리다 못해 마중을 나온 건 산장지기 피에트로였다. 좀처럼 표정 변화 없이 작은 아랫니만 웅얼거리는 산양들이 그 뒤를 부산스럽게 따랐다.
“당신은 똥 마려운 사람처럼 엉거주춤하고 있군요. 산에선 춤을 춰야 살아남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피에트로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협소한 능선에 흩어진 날 선 바위를 점프하며 춤추는 동작을 보였다. 그의 깐족대는 발은 능선을 붕붕 떠다니던 알프스 구름처럼 가볍고 날렵했다. 항변하고 싶었지만 이미 내 영혼은 반쯤 구름 너머로 희미해진 상태였다. 궁둥이는 무겁고, 졸음이 쏟아졌다. 젖은 낙엽처럼 무너져 있던 나를 내려다보며 피에트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beer?”
발바닥이 벌떡 일어났다. 출발한 지 9시간이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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