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모든 것을 잊게 만들고, 모든 것을 바라보게 한다. 복숭아뼈의 통증과 발바닥의 저릿함, 코끝까지 차오르는 숨의 압박으로 몸은 물 먹은 소금처럼 무겁다. 한 발자국 바위를 딛고 한 발자욱 앞으로 향하는 행위만 무수히 반복하는 중이다. 무심한 바위와 반짝이며 흩날리는 부슬비, 먼 곳에서 밀려오는 잿빛 구름이 불안한 마음을 한층 끌어올리고, 끝없는 바위 능선에 깊고 괴로운 숨이 가까스로 매달린다. 산기슭 비좁은 바윗길을 걷는 것 이상으로 작은 폭포수를 건너는 일이 괴롭다. 미끄러운 이끼가 없는지 발로 여러 차례 비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몸이 물결에 빨려 내려가지 않도록 주저앉아 손을 뻗고 발끝에 무게를 싣는다. 그럴 때면 몸과 마음이 하나의 팀을 이룬 것 같다. 안전한 땅에 이르렀음에 가슴을 쓸어내릴 때 그제야 보이지 않는 풍경을 본다. 키큰 양치식물이 드문드문 보이긴 하지만 2,000m 암릉에는 이름 모를 작은 수풀이 지천이다. 바위에 뿌리내린 작은 식물 사이에 개미집이 여기저기 봉긋하게 솟아 있다. 개미들은 이 단단한 노두 아래 그들만의 세계를 열심히 만드는 중이고, 머리 위로 검은 새들이 활강하며 어슬렁거린다. 이 모든 괴로움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자주 절망적인데, 동시에 경이로운 풍경 앞에서 종종 얼어붙는다. 나는 이 엄중하고 진지한 풍경과 대면하며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 온몸의 감각을 헤아린다. 내가 멈출 때마다 J는 나를 살폈다.
폐허가 된 돌 오두막에서 노란색 표식이 달린 숫양을 보았을 때 그제서야 산장 가까이에 도달했음을 짐작했다. 검은 양은 능선을 타고 빠르게 올라오는 흰 구름 속에 있었기때문에, 무척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낫처럼 휘어진 날 선 뿔로 위협할 것 같다가도, 산장으로 안내하는 수호의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빛과 어둠이 일렁이는 산골짜기에서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렸을까. 한참 나중에야 그가 실은 피에뜨로의 산장에서 잠시 휴가를 나온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수많은 부인이 산장에서 매일 신선한 우유를 공급할 때, 그는 자유의 몸으로 알프스의 태양을 만끽하고 있던 것이다. 건방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초록 능선의 산기슭에서 땡그랑거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렸다. 잿빛 편마암으로 쌓아 만든 산장 주변으로 검은 양들이 점처럼 박혀 느리게 움직였다. 그토록 고대하던 산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간곡하게 기다린 이는 피에뜨로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온 부부와 독일에서 온 중년 남성 2명, 이곳에 반해 오래 머물고 있다는 산드라까지, 산장에 머물며 알프스 트레일을 걷는 하이커들이 진작 이곳에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전에 출발한 여성 2명이 저녁 7시가 넘도록 도착하지 않으니 그럴만하다. 구름이 내려앉은 알프스의 황혼은 너무 황홀해서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지끈거리는 발바닥 탓도 있었을 것이다. 오른편에는 스위스에서 가장 높은 몬테로사 정상봉이 보이고, 왼편에는 스위스에서 가장 낮은 지점인 마조레 호수가 산과 산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검은 구름 사이 대지로 낙하하는 빛이 일렁거리고, 양들이 부지런히 풀을 뜯으며 방울 소리를 끊임없이 뿌려댔다. 탁 트인 풍광 앞에서 나는 헐벗고 야외 욕조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양들이 먼저 욕조를 차지했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죽지 않고 지금 여기 있음에 감사했다.
“300년 된 목동의 오두막입니다. 여기 뒤에 있는 건물 2개는 주변 돌을 모아 제가 직접 지었죠. 오후 5시에는 아침에 짠 산양유와 신선한 치즈로 아페로를 내는데 그걸 놓쳤네요! 그래도 저녁 식사 시간전에는 도착해 다행입니다.”
은행원으로 일하던 피에뜨로는 삼촌이 운영해온 목장을 이어받아 이곳에서 양을 돌보며, 하이커들에게 숙박을 제공한다. 건강하고 다부진 체격의 잘생긴 외모는 누구라도 호감을 가질 만하다. 산장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다시 온 후 오래 머물고 있다는 산드라의 눈빛도 피에뜨로를 향하고 있다. 그의 충실한 직원 두 명은 각각 루가노와 독일 북부에서 온 청년인데, 온갖 궂은일을 묵묵히 하는 중이다. 저녁은 표고버섯 리소토와 티치노 전통 소시지가 나왔다. 디저트로 생크림을 얹은 초코케이크까지, 장시간 하이킹을 해야 도착하는 외딴 산장의 요리라고 하기에는 화려한 성찬이다.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정신이 반쯤 나가 있지 않았더라면 두세 그릇은 족히 먹고 슈납스까지 해치웠을 것이다. 천근 같은 눈꺼풀이 눈알을 계속 덮는데다가, 깔깔거리는 소리가 귀에 닿지 않는 몽롱한 상태가 이어져 음식을 삼키는 것조차 힘겨웠다. 더는 견딜 수 없어 번데기처럼 침낭으로 들어가 그대로 산장의 유령이 되었다.
새벽같이 출발하는 다른 하이커들의 움직임으로 일찍 눈이 떠졌다. 머리 위로 청명한 푸른 하늘이, 발아래 복실복실한 구름이 뾰족한 산맥 사이를 굴러다녔다. 피에뜨로와 산장 식구들은 새벽부터 산양유를 짜느라 분주하고, 나는 똥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들의 움직임을 영화를 보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똥을 밟지 않을 수가 없다) 양들은 산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 먹지만, 피에뜨로가 부르면 총총걸음으로 내려와 제몸을 내어주고 빵조각을 얻어먹었다. 양들은 뿔을 부딪치며 싸움을 하기도 하고, 종종 큼지막한 머리를 내 허리춤에 비비며 빵조각을 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나름의 질서와 규칙으로 평온한 아침 시간에 양의 꽁무니를 쫓고 싶어 환장한 산장 강아지 브와나만 가장 괴로워보였다.
동화 같은 풍경이 바라보이는 부엌에 앉아 곡물빵에 야생화꿀, 밤잼, 누텔라를 야무지게 발라 먹으며 지금 누리고 있는 보석 같은 순간에 관해 생각했다. 검은 양, 푸른 새벽, 하얀 치즈를 보면서 ‘당신이 결코 두 번 보게 되지 않을 것을 사랑하시오’ 라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의 말을 떠올린다. 몸에 닿는 바람과 물의 냄새, 브와나의 숨소리, 흑백 음영의 비구름과 육중한 바위의 그림자, 나를 돌본 J와 사람들의 환대, 그리고 나를 허락한 알프스의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경험하는 매 순간이 곧 과거이므로, 나는 현재를 더욱 충실하게 살고 생각하고 사랑하리라.
나는 모닝커피를 석 잔이나 마시고, 브와나와 진한 포옹을 하고, 양을 쓰다듬고, 사람들의 무심한 듯 따뜻한 작별 인사를 받으며 하산길로 향했다. 출발한 길과 달리 마지아 마을로 가는 트레일은 줄곧 경사 있는 내리막길이었다. 선글라스를 잃어버렸고, 엉덩이는 흙범벅이 되었으며, 5시간이 지나서야 평평한 땅을 밟았다. 모든 것이 좋았고, 모든 것이 믿기지 않는다. 12시간을 넘게 잤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