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와 함께 율동공원과 이어진 야산을 산책하다가 '그것'을 보았다. 멧돼지 가죽을 뒤집어쓴 두 발 달린 ‘어떤 것’이었다. 전체를 감싼 가죽(혹은 마대자루)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밧줄을 허리에 여러 번 둘러 고정하고, 가면 앞으로 솟구친 송곳니 사이에는 타이어로 만든 큼지막한 콧구멍이 갈고리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누가 봐도 자지러질 형상이었지만 엉거주춤한 두 발로 작은 나무 사이를 내달리는 그것이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것이 짐승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외부에 알려야 한다. 혹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경박한 게임이라 할지라도 사냥개의 타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저씨, 그건 멧돼지가 아니에요. 사람이라고요. 제가 똑똑히 봤어요. 두 발로 뛰어가는 모습을요. 심지어 그것은 우물쭈물했어요. 나를 보고 잠시 응시하더니 방향을 바꿔 그대로 달아났다고요. 그것은...” 난 재난 뉴스의 목격자처럼 흥분한 채 말했다. 이미 공원 스피커에서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대피를 알리는 안내 말이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멧돼지를 처리하겠습니다! 멧돼지를 처리하겠습니다!
“그것은 능평리 멧돼지입니다. 먹이가 고갈되어 두 발로 서서 사냥 거리를 찾습니다.” 엽총을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큰 남자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엽사의 붉은색 모자에는 안전한 포획이라 쓰여 있었다. “말도 안 돼요!” 두 발로 걷는 멧돼지가 있는지 잠시 골몰했다. “용기 있는 제보 감사합니다. 어서 공원으로 내려가세요. 이곳은 위험합니다.” 그는 나의 출현이 귀찮아진 듯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했다. “내게 뭔가 말하려는 눈이었어요! 그것은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고요!” 어떻게든 이 진압을 말려야 했지만 그럴싸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쨋든 상세한 제보 감사합니다!” 큰 남자는 냉큼 고개를 돌리고, 순식간에 산으로 미끄러지며 말했다.
“멧돼지를 처리하겠습니다!”
멧돼지를 처.리.하.겠.다.고? 사살하겠다는 말인가? 더욱이 멧돼지가 아닌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난 걱정스러웠다. 혹여 그것이 진짜 멧돼지라 할지라도 산에 서식하는 야생동물을 죽일 권리는 없다. 멧돼지로 태어난 이상 그들도 어디에선가 먹이를 구하고 새끼를 돌보며 함께 생존해야 한다. 나는 우리집 침실 너머의 야산에서 '붹붹' 거리던 멧돼지 한쌍의 다정한 대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 마리가 '부엨!' 하고 먹이의 위치를 알리면, 다른 한 마리가 '부엨!' 하고 대답하며 달려왔다. 능평리 야산이 온갖 난개발로 처참하게 쓸려가는 동안 멧돼지의 먹이 나눔은 점점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들은 위협적이기 전에 늘 배가 고팠고, 숨을 곳이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귀여움과 다소 거리가 먼 비호감 외모를 지니고 있다. 멧돼지 땅에 산책로를 만들었으니 인간이 그들의 집을 허락 없이 가로지른 셈이다. 나는 멧돼지의 입장이 궁금했다. 마대자루를 둘러메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그것을 다시 만나 물어보고 싶었다.
“걱정마, 죽이지는 않을거야. 그들이 온 산의 돼지를 잡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안전 때문이 아니야. 그들에게 저것들은 이를테면 타란툴라와 개구리 같은 관계야. 타란툴라를 죽이면 개구리도 죽거든.” 루이가 말했다. “멧돼지가 타란툴라라고? 대체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루이는 종종 모든 과학 정보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에 짜증이 일어났다. “얼마 전 동아사이언스 뉴스를 읽었어. 뇌연구원 실험실의 멧돼지가 탈출했다는 뉴스였는데, 민가에서 고구마를 파먹다가 결국 사살되었지. 그 멧돼지가 뇌연구원에서 젊음을 대치하는 혈장 제공 실험체이던 사실은 아무도 모를걸? 그들의 피는 단순히 노화를 멈추는 게 아니야. 있던 주름이 사라지고, 검은 머리카락이 나고, 피는 더 깨끗해져. 어떤 사람들에겐 돈보다 훨씬 중요한 거야. 젊음을 주는 피가 그 안에 있으니까. 그래서 멧돼지가 필요한거야.” 루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일부러 멧돼지를 잡아들이고 있다는 거야? 그게 전국의 멧돼지를 잡는 진짜 이유고?”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과학자들은 말이야. 증명하기 위해 온 인생을 바치지. 증명하지 않으면 마치 그들의 가치를 잃는 것처럼 호들갑 떨면서 말이야. 그들은 언제나 늦으면서도 평생 증명하느라 그 명석한 두뇌를 소비해. 반면 세상은 증명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블랙홀처럼. 그들은 멧돼지 피로 젊음을 일시적으로 가져올 수 있겠지만, 미래에 어떤 대가를 불러올지는 모르고 있어.” 루이는 마치 멧돼지의 말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도 죽음을 거스를 순 없어...” 나는 풀이 죽은 채 말했다.
산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산하기로 마음 먹었다. 길목의 이곳저곳이 깊게 패 있고, 옆에는 그만큼의 흙이 한 움쿰씩 쌓여 있었다. 멧돼지의 흔적인지, 사냥개의 발길질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니면 큰사람들의 추적을 교란하기 위해 파놓은 함정인지도 모른다. 앞장서던 루이가 뒤를 돌아보고 뭐라 뭐라 말하였지만 날 선 바람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진짜 멧돼지이든 그것이든 만난다면 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멧돼지의 한방으로 나는 그들의 밥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쯤 그림자가 나타났고,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사냥개들이 봅슬레이처럼 경사면을 따라 순식간에 미끄러졌고, 나는 그만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순간 등 뒤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소리에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것은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머리 위에서 말했다.
“죽음에도 평등이 있어. 난 그들에게 평등을 주고 싶었어.”
빛이 너무 강렬하게 떨어져 말하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광선 아래 작은 속삭임이 고요하게 웅얼거렸다. 나는 떨리는 소년의 눈빛을 보았고, 숨겨둔 기피와 혐오가 새어나왔다. 사냥개 짖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