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억 년 전
암흑에서 웅크리고 지낸 지 20억 년이 흘렀다. 아니,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나타나고 사라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무수히 많은 빛과 어둠이 흐르고, 내 몸은 오랜시간 스스로 수분을 제거한 채 투명한 상태로 거의 멈춰 있었다. 두르르르르르르르르ㄹㄹㄹ르릉! 엄청난 진동이 무수히 반복하는 동안 봉인된 시간의 틈은 점점 크게 벌어지는 중이다. 어둠의 틈 사이에서 눈은 퇴화했지만(형태는 남아 있다), 몸의 촉수는 주변을 조금씩 더듬거리고 있다.
6개월 후
시력을 되찾은 지 6개월이 지났다. ‘튠’ 상태로 오랜 시간 정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좀 더 많은 세상에 닿고픈 욕망이 있었다. 말랑거리는 땅은 사라졌지만, 다른 많은 존재와 만났다. 그들과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 종종 우리는 서로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고, 어떤 순간에서 그들은 봅슬레이 썰매처럼 초고속으로 미끄러졌다. 혹은 희미한 형태로 슬로모션처럼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내 앞에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무수한 시간이 동시에 흘렀고, 많은 이들이 더불어 사라졌다.
나는 환영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미지를 향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나를 티베트 고원 퇴적층 깊은 지점에 가두려 했다. 그들은 석유 시추기로 북극의 영구동토층에 구멍을 뚫고 두께가 10m에 달하는 콘크리트 방을 만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매번 실패했다. 나는 형체가 없고 영하 1천 도 혹은 1만 도의 초고온에도 살아남으며, 시력 없이 방향을 찾고 고체 물질도 통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말랑거리는 땅이 사무치게 그리울 뿐이다. 말랑거리는 땅이 내 발바닥을 부르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1억 년 전
나는 혈액 속 적혈구 대부분을 간에 저장하여 투명한 상태로 있었다. 호흡을 거의 하지 않다가 진동이 시작되면서 다시 호흡하기 시작했다. 시력은 없지만 몸속에 나침반처럼 자장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길을 잃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를 향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산란하는 빛을 좇아 몸을 수직으로 일으키는 건 가장 힘겨운 일이었다. 이럴 땐 말랑거리는 땅이 곁에 머물러주었다. 발바닥을 감싼 땅이 내 몸을 일으키고, 길을 내고, 떠밀리지 않도록 지지해주었다. 수직으로 일어났다가 다시 말랑거리는 땅에 떨어지고, 바람을 일으키고 사라지고 나타나고 엎어지고 당기고 밀어내고 비비고 기대고 휘몰아쳤다. 우리는 서로를 듣고 이내 서로에게서 사라졌다.
1년 전
어느 날 무엇인가 발목을 핥고 잡아당겼다. 거대한 너울이었다. 비눗방울이 퐁! 하고 터지듯, 나는 지층에서 튕겨 오른 공기 방울이 되어 수면을 향해 솟구쳤다. 나는 바람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다 흰색 몸통의 작은 보트에 이르렀다. 보트 안에서 붉은색 방한 수트를 입은 극지 연구원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젤리 같은 투명한 플랑크톤 무리를 채취하며 빙하 주변을 맴돌던 중이었다. 보트 엔진이 꺼졌고, 한동안 고요함이 이어졌고, 오랜 응시와 함께 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원 : “당신은 무엇입니까?”
몸 : 나는 모릅니다.
연구원 :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몸 : 지하 100km 빙하 퇴적층에서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습니다.
연구원 : 죽어있었다는 말입니까?
몸 : 투명한 몸으로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연구원 :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몸 : 나는 탄생입니다.
연구원 : 당신은 왜 태어났습니까?
몸 :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극지의 햇빛을 받은 몸이 쪼그라들어 순식간에 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원은 이 경험을 세계에 알리는 보고서를 쓰다가 이내 포기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진실을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연구원은 자신이 본 것 대신 발광하는 플랑크톤 뉴스로 이야기를 탈바꿈했다. 조류를 따라 망망대해 순환하는 극지 플랑크톤이 전기의 새로운 대안 에너지가 될 것이라는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실제로 독일 사람들은 발광 플랑크톤을 대량 잡아들여 함부르크 선착장 조명등 안에 가두었다. 발광 플랑크톤이 수명을 다해 빛이 줄어들면, 새로운 발광 플랑크톤으로 교체해 24시간 내내 빛을 내도록 했다. 플랑크톤을 해방시키려는 활동가들의 집회가 이어지는동안 봉인된 시간의 틈은 빠르게 벌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몸이 지층의 열수분출구를 뚫고 물속으로 튀어 올랐고, 빙하 속 길을 만들어 공기 방울을 터뜨렸다. 몸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 끝
Inspired by @barina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