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어서 배를 타야 해요.”
선박 주인이자 린난사리 국립공원의 관리자인 오스카리 사니스토가 선박의 밧줄을 능숙하게 풀며 말했다. 40년 된 목제 선박은 여섯 명이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크기였는데, 한쪽에 굴뚝이 달린 사우나 배쓰가 보였다. 맙소사, 이쯤이면 사우나가 그들의 영혼까지 다스리고 있다 할 만하다. 핀란드 여행 내내 매일같이 사우나에 동참해야 했는데, 그건 유쾌하고도 피로한 일이었다. 좀처럼 말이 없고, 거리 두기가 일상인 핀란드인에게 사우나는 비밀의 장막이 열리는 사교 활동의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가면을 벗는 자리인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보세요. 운이 좋으면 사이마고리무늬물범을 만날지도 모르니까요.”
오스카리의 진지한 말을 듣고 뱃머리에 앉아 고요한 사이마 호수를 한참 응시했다. 호수인지, 바다인지 헷갈릴 만큼 거대한 흐름 속에 고래를 닮은 검은 바위가 점점이 박혀 있고, 먼 곳의 짙은 녹음 속에 사우나 연기가 하얗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이마 호수는 최고 수심 86미터, 연안선 총거리가 1만 3,700킬로미터로 레이크랜드에서 가장 큰 호수다. 호수의 나라 핀란드에는 사이마 호수 같은 물길이 육지 도처에 혈관처럼 흐른다. 한 지리학자 발표에 따르면 핀란드 연안선의 총길이가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와 비슷한 31만5,000킬로미터라고. 그것에 비하면 사이마 호수는 작은 연못에 불과하다.
아쉽게도 카르넷사리섬에 도착할 때까지 물범의 콧구멍도 보지 못했다. 오스카리는 배가 선착장 가까이에 이르자 물에 뛰어들어 뱃머리를 직접 땅으로 끌고 갔다. 허리춤까지 호수 물결이 출렁거렸고, 부슬비가 적신 땅에서는 축축한 광물 향이 흘러 다녔다. 땅에는 섬의 유일한 거주자이자 섬지기인 헤이디 후르스카이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르넷사리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익숙하게 인사하는 헤이디는 선착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붉은 오두막에서 혼자 지낸다고 했다. 상하의가 붙은 형태의 작업복에는 여기저기 수선한 흔적이 있고(근사했다), 허리춤에 손바닥만 한 칼을 둘렀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칼이 무척 활용도가 클 것이다. 버섯도 채취하고, 쿡사(핀란드 전통 컵)도 만들고, 덩굴도 해치우고, 과일이나 치즈도 잘라 먹고. 그녀는 미간이 넓은 편에 코가 두툼하고 목이 굵어 조금 답답해 보이는 인상인 데다가,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 오는 걸 환영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가 아무도 없는 먼 호수 한가운데 홀로 사는 까닭이 무척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헤이디는 우리에게 섬을 제법 상세하게 안내했다. 섬은 직선거리로 1시간 걸으면 반대편에 닿을 정도로 작고 평평했다. 키 큰 나무가 정글처럼 덩굴을 이루고 있어서 숲으로 들어가면, 하늘빛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무 아래에는 노란 버섯들이 눈에 띄게 솟아 있었고, 나는 어디든 주저앉아 산딸기를 주워 먹었다. 핀란드에서는 누구나 버섯과 산딸기를 따 먹을 수 있는 ‘만인의 권리’가 있으니까.
말을 먼저 건넨 이는 헤이디였다.
“물범을 보셨습니까?”
“아니요, 수줍은 친구인 것 같아요. 물범이 이 근처에 사나요?”
“지난 겨울 나는 물범이 새끼를 기를 수 있도록 섬 근처에 눈 둥지를 만들어 주었어요. 눈이 거의 오지 않았거든요. 눈이 쌓이지 않으면 물범 새끼는 생존할 수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새끼 2마리가 태어났습니다.”
헤이디는 사이마 호수의 수은 농도가 높아져 떼죽음을 당한 사건과 낚시꾼들의 그물망으로 새끼들이 죽음을 당한 재앙, 악마같은 사람들의 사냥 등에 관해 쉴 새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사이마고리무늬물범을 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호수를 매입하고 얼음 은신처인 스노 뱅크를 만드는 일밖에 없다며 물범 펀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헤이디는 둥지가 방해받지 않도록 망을 보고, 이방인의 접근을 감시하며 오두막에 홀로 머물고 있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태양광으로 얻은 전기만 쓰고, 호수에서 퍼 올린 물을 정수해 생활했다. 여행자들이 섬 구경을 하러 종종 배를 타고 들어올 때 필요한 식자재를 받을 뿐 최소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도 와인은 꼭 필요합니다. 밤이 길거든요.”
“쉬는 날엔 주로 뭘 하나요?”
“주로 듣습니다. 당신이 의심하지 않는다면, 물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헤이디가 물범이 수면 위로 콧구멍을 열고 닫으며 내는 숨 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우리가 섬을 둘러보는 동안 오스카리는 오두막 앞에서 팬케이크와 슈납스, 장작불을 준비했다. 헤이디는 긴 나무 꼬챙이를 매끈하게 다듬은 다음 큼지막한 소시지를 꽂아 불에 살뜰하게 구워주었다. 우리는 차가운 호수에 담가둔 샴페인을 나눠 마시고, 노란 버섯을 구우며, 간간이 서로를 보고 웃었다. 페이스북 아이디를 교환하고 그녀에게서 핀란드어 몇 개를 배웠다. 난 안전함을 느꼈다. 자연을 걱정하고, 물범을 돌보는 그녀가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것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오스카리는 육지로 떠나고, 나는 오두막에서 헤이디와 함께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