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중년 남성, 엄마와 아이, 초록색 상의를 입은 이웃 청년(청년이 아닐 수도 있다)이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전광판에 쓰인 1500-2번의 대기시간은 무려 25분이었는데, 그것은 우리집 강아지가 뒷산을 헤집으며 팔자 문양으로 자세를 이렇게 저렇게 잡아 똥을 세 번이나 싸는 시간보다 길었다. 더는 직장인의 삶을 살지 않게 되면서 가장 좋은 것은 비정상의 정상화다. 이를테면 솜사탕 점심을 먹고 케일쉐이크가 맛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재수 없는 사람에게 인사하지 않아도 되는, 한 시간 내내 허공을 쳐다보고 있어도 장이 편안한 상태 같은. 초록색 상의를 입은 이웃 청년처럼 버스 한두 대 정도는 그냥 보낼 수 있는 마음을 포함해서 말이다.
“저는 지금 버스 세 대를 그냥 보냈어요.” 초록색 상의를 입은 이웃 청년이 말했다.
“좌석이 없었나요?” 나는 휴대폰의 시계를 바라보며 무감각하게 말했다. 23분이나 남았다.
“아니요, 버스에 오를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거든요.” 청년은 진지하게 말했다.
“왜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나요?” 나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몸을 돌려 물었다.
“그건 나도 몰라요. 마음이 하는 일이니까요.” 청년은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음이 어디에 있죠?” 나는 그가 헛소리한다고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글쎄요. 확실한 건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청년은 확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럼 누가 결정하는데요? 당신의 마음이잖아요.” 나는 의뭉스러운 대화에 지쳐가는 중이었다.
“그런 적 없나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날에, 아무것도 아닌 시간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그런 순간이요. 칼이 떨어져 그대로 꽂혔는데, 발가락 사이로 추락해 발가락이 멀쩡했던 일이나, 시야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박새를 바라보느라 잠시 멈췄는데 코 앞에서 버스가 봅슬레이처럼 밀고 지나간 것 같은…” 그가 말했다.
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이방인의 발 빠른 대처로 구출된 순간이 있었고, 강도에게 당하려는 찰나에 경찰이 나타나 무사한 적 있으며, 사막의 밤에 낙타에게 밟힐 뻔하다가 은하수를 목격한 적이 있고, 거대한 간판이 코앞으로 떨어져 목숨을 건진 적 있고, 태풍으로 모든 것이 휩쓸려 갈 때 나를 잡아준 어떤 손이 있었다. 지금은 내가 죽을 때가 아니라고 이미 쓰여 있는 것처럼. 내 몸과 마음 모두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내가 애쓰지 않아도 일어난 일이었다.
“글쎄요, 아마도 전 그런 경험을 지금 겪고 있는 것 같군요. 제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오늘 다른 사람이 되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면서 이별을 선언했어요.” 난 정말이지 울 것 같았다.
“아 뭐라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상실은 고통이죠.” 청년은 정말 슬퍼하는 것 같았다.
“이건 고통이 아닙니다. 불공평이에요. 분노입니다.” 나는 외치듯 말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악어를 보내세요. 롬복섬에 악어로 변신하는 능력을 지닌 사사크족이 있어요. 악어로 변해서 적을 잡아먹는 거죠. 특히 불륜을 저지르면 등을 맞대 묶인 채 악어 소굴에 던져져요. 버스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청년이 소곤거리며 방법을 알려주었다. 인도네시아에는 아묵amok이라는 비인간 상태가 있다. 전쟁이 벌어지거나,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면 부족 사람들은 정당한 분노에 휩싸인 사람이 ‘아묵’ 되는 것에 동조하고 합의한다. 그리고 아묵은 어떠한 잔인한 일도 허용된다. 사건은 곧 전설이 되어 ‘아묵이 나타났다!’ ‘그들이 아묵 했다’라고 다음 세대로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시는 아묵이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것이다. 아마 그 악어는 아묵을 말하는 것일 테다.
이제 곧 1500-2번 버스가 도착할 것이다. 먼저 아이 엄마로 보이던 여성이 17-1번 버스를 타고 떠났다. 기껏해야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홀로 남았다.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 엄마 아니에요.” 아이는 곧 19번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마치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참 그거 알아요? 침팬지는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아요.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도,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알거든요. 그러니까 침팬지는 헤어졌지만, 실제 헤어진 건 아니에요.” 이웃 청년이 말했다. 그는 내가 1500-2번 버스에 오를 때까지 버스를 계속 떠나보냈다. 어쩌면 버스를 탈 마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마음이 버스를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청년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제야 그의 상의가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임을 알게 되었다.
잔여 좌석은 19석이었다. 2개씩 자리가 붙어 있는 구조의 좌석 현황을 재빠르게 훑었다. 창가에 앉은 그들 모두 옆자리에 허벅지 하나를 걸치고 있거나, 크고 작은 짐을 올려 두었다. 절대 본인 옆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리라는 투지에 찬 태도로 말이다. 나는 그대로 서 있고 싶었지만, 이태원 참사 이후로 광역버스의 입석이 금지된 까닭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옆 좌석에 가장 작은 가방을 놓아 둔 젊은 여성에게 눈빛을 보내고 마지못해 앉았다.
버스에서 나는 비극적 뉴스를 접했다. 여행자를 태운 남극의 작은 크루즈가 이부ivu로 인해 흔적도 없이 바닷속에 빨려 들어갔다는 내용이었다. 이부는 한겨울에 거대한 해빙 덩어리가 내륙으로 수백 미터 돌진해 들어오면서 사람들을 압사시키는 현상이다. 거대한 빙하 그림자가 천둥소리를 내며 나를 덮치고 차디찬 바다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아비규환의 장면을 떠올렸다. 나는 혼자였다.
사람들을 하차시키고 버스가 막 출발하였을 때 한 사내가 전력 질주하며 옆으로 따라붙었다. 손바닥으로 버스 옆구리를 열렬하게 두들겨 기어코 버스 문이 열리도록 만들었다. “미안합니다. 장갑을 두고 내렸어요.” 나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고맙다고 연신 말하며 장갑을 챙겨 다시 내렸다. “안녕히 가세요.” 버스 기사가 다정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깊은 안도감이 들었고, 10여 분간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떴을 때 63빌딩 건물이 태양 빛을 받아 황금빛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었다. 일렁이며 타오르는 물결 사이에서 거대한 악어가 물을 하늘로 뿜으며 수직 상승하는 형상이 아른거렸다. 범접할 수 없는 현상을 목격하고 공포에 질리던 사람들은 이내 알 수 없는 경이로움에 빠진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분홍빛 산호색 구름을 뚫고 차오르는 그것을 나는 창 너머 전면으로 마주하고 서로를 응시했다. 나는 어렴풋이 미소 지었다. 악어가 생기고 사라지고, 들어가고 나가고, 먹고 먹히고, 이루어지고 무너지고, 버스가 목적지인 화양사거리에 도착했다. 나는 아묵이 되지 않기로 했다.
좋은 날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