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시간 동안 바람이 거대하게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시야를 완전히 가릴 정도로 빗방울이 큼지막했다. GPS가 망가져 나침반을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비구름이 산야를 뒤덮자, 밤과 낮을 구분하기 어려웠고, 방향 또한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산에서 무리와 멀어진 뒤, 절벽의 동굴 속에서 스스로 길을 잃었다고 인정하기까지 3일이 걸렸다. 정확히는 세 번의 낮과 네 번의 밤이 흘러갔다. 내가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지만 견딜 만했다. 가벼운 산행이라도 비상식과 여분의 옷을 챙기는 편이었고, 재난 시뮬레이션을 여러 차례 한 것도 진정에 도움이 되었다. 나는 수시로 혼잣말을 했다. ‘나는 지금 조난당했고, 동료들은 나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나는 살아남고, 살아남는다. 나는 살아 있다, 깨어 있다.’ 목소리가 동굴의 반짝이는 천장을 휘감고 끝없는 암흑으로 미끄러졌다. 누군가 있다면, 메아리를 보내다오.
비가 가늘어지던 날, 동굴의 깊은 안쪽에서 뾰족한 빛이 흘러나왔다. 날 선 섬광이 얼굴에 닿자 마굿간 냄새가 났고 뺨에 온풍이 흘렀다. 불이었다.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한 노인이 장작불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미소가 보이고, 목덜미가 보이고, 불꽃이 맹렬하게 이글거리는 눈이 보였다. 노인은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드디어 왔군요, 나의 죽음을 목격해 주시오.”
“비가 그쳤으니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죠?”
“5백 년 동안 당신을 기다렸소.”
“난 당신을 몰라요! 그리고 당신은 멀쩡해요. 적어도 그래 보인다고요! 나랑 당장 이곳에서 나가요. 함께 길을 찾아봅시다!”
노인의 다리는 수분이 모두 빠져나간 고목 뿌리처럼 심하게 뒤틀리고 쪼그라져 있었다. 움푹 패인 눈과 그대로 드러난 작은 골격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앙상해 산 자의 몸이라 믿기 어려웠다.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당신은 죽음으로 가는 입으로 들어온 겁니다.”
“헛소리 말아요! 이곳에 머무는 건 당신 자유지만, 난 당장 내려가겠어요!”
“이곳은 동면한 곰이 깨어나는 소굴입니다. 수선화가 피어나는 계절엔 누구도 살아남은 적 없지요. 곰이 가장 굶주린 시기니까요. 나의 육신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방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앉은 자세로 입을 반쯤 벌린 채 숨을 거두었다. 동굴 밖에서 죽어가는 몸의 냄새를 알아차린 독수리가 하늘을 배회하고, 종종 곰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렸다. 절벽 아래에서는 괴물 같은 파도가 절벽 위로 검고 하얗게 솟구쳤다. 어디에도 아래로 내려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미친 할방구같으니라고!
노인의 몸은 빠르게 달라졌다. 앙상한 몸이 부풀어 오르다가 가슴과 배, 겨드랑이가 갈라져 비장과 신장, 폐, 간이 새어져나왔다. 힘줄이 드러나고 피부의 더러운 때가 갈라졌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털은 그새 자라난 것처럼 건재해 보였으나 불과 몇 시간 만에 파리가 날아와 알을 낳기 시작했다. 입과 콧구멍, 항문과 얇은 피부 점막에 깨알처럼 달라붙어 알을 낳았고 하루도 되지 않아 구더기가 우글거렸다. 그들이 세 번의 몸을 바꾸는 동안 땃쥐와 흰개미가 파고들었다. 파리 다음으로 노인을 찾아온 것은 딱정벌레였다. 딱정벌레 수백 마리가 모여들자,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송장벌레, 반짝거리는 비단벌레와 풍뎅이, 작은 무당벌레까지 산에 사는 온갖 딱정벌레가 다 모였다. 피와 살이 땅으로 스며들고 벌레와 고름들도 아이스크림처럼 떨어지고 녹아내렸다.
노인의 육탈과 악취를 목격하는 시간은 견딜 수 없는 역겨움과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더는 마을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곰과 독수리의 존재가 두렵지 않았다. 나는 죽음과 삶, 과거와 미래, 감각과 청정, 형태와 상태, 무한과 유한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죽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경계에 있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백골이 드러났을 때 나는 메김소리를 내며 두개골을 동굴 바깥으로 밀기 시작했다. 노인을 바다로 보내고 싶었다. 에스키모들이 고래를 해체하고 난 다음 턱뼈를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처럼. 턱뼈에 고래의 영혼을 실어 보내는 것처럼.
“잘 가시오. 원래 왔던 곳으로.”
나는 그제서야 동굴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슬렁거리는 그림자를 쫓아 작은 구멍을 빠져나왔다. 나는 절벽을 타고, 곰과 표범을 가로지르고, 독수리의 눈을 마주했다. 그들은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둑한 나무덩굴을 지나자 바로 아랫마을이었다.
산에서 조난 당한지 5년이 흘러 있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