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을 비비고 앉아 주변을 훑어보았다. 투명한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는 생명의 기운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무수한 적막이 흘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 장치가 긴 호스로 연결되어 내 몸에 박혀 있는데, 그 몸이 나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이 무시무시했다. 입 밖으로 한 음절도 나오지 않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감각할 수 없거나, 감각이 상실되었거나. ‘18번’이라 적힌 문짝에 벽돌 크기만 한 유리창이 있었고, 그 너머로 간간이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다’
(수술복처럼 보이는) 원피스 형태의 옷은 앞과 뒷면 모두 대충 끈으로 고정한 상태로, 거의 홀딱 벗은 셈이었다. 뒤통수를 따라 길게 연결된 주머니에 핏물이 고여있고, 소변줄로 말간 소변이 흘러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엊그제 브라질리언 왁싱을 받은 것을 기억해냈다. ‘소변줄을 끼우기 쉬웠겠군.’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소변이 흐르고 있다는 상태가 놀랍고 수치스러웠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서늘한 공기를 뚫고 나지막한 허밍 소리가 들려왔다. 까르륵거리다가 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일정한 간격으로 벨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던 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물어볼 것이 수십 가지나 되었지만, 여전히 말문이 막힌 상태로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눈을 깊게 감았다가 서서히 떠보았다. 꿈은 아니었다.
“깨어났군요, 방금 뇌신경의 재배열을 마쳤습니다. 수술은 아주 성공적입니다. ”
“여기는 어디죠?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당신은 누구시죠..!”
“뇌신경이 변하면 종종 기억을 잃곤 합니다. 재조합되기도 하고요. 안정을 취하면 다시 기억이 돌아올 겁니다.”
그들은 내가 펠드먼 배럿 미래 재단의 VIP 고객으로 여성과 남성의 기능을 모두 지닌 인류 최초의 미래인간이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지속 가능한 다음 세대를 위한 자발적 실험체로서 막 슬픔의 감각을 없애는 시냅스 재배열 수술을 받았고, 나이는 153살이며, 가족은 없다.
“당신은 미래인간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헌신과 노력에 깊은 존경을 지니고 있어요. 인류의 30%만 남았지만, 우리는 당신에게서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나는 어제 브라질리언 왁싱을 받았다고요. 여름에 퀸즐랜드 대산호초에서 거북이와 다이빙을 할 계획이었다고!”
그는 나의 기억이 120년 전에 머무르고 있다며 나의 몸 상태에 관해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래를 보는 뇌
필터링되지 않은 신생아의 뇌를 유지하고 있다. 보통 성인의 경우 사용하지 않는 시냅스는 가지치기하듯 정리되는데, 나의 뇌는 모든 가능성을 지닌다. 그래서 뇌에 스위치를 달았다. 복잡한 네트워크가 동시에 작동할 경우, 정제되지 않은 감각이 한꺼번에 들어와 미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뇌의 필요 부위에만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시냅스의 압축과 화학 반응이 깊고 빨라져 가까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아직 기술 개발 단계로, 상대방이 막 말하고자 하는 것을 미리 아는 정도다.
끊임없이 발화하는 눈
첫 번째 시신경 기능은 이미 끝난 지 오래다. 과거의 시신경 패턴을 불러와 새로운 시력을 두 번 회복시켰다. 최상의 감각을 위해 잠을 잘 때도 뇌는 망막으로 빛의 입자를 끊임없이 보내 자극을 멈추지 않는다. 다양한 색채의 꿈을 꾸는 것은 시신경 운동을 위한 것으로 후천적 주입이다. 내가 원하면 꿈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불러올 수 있고, 노르웨이의 오로라를 볼 수 있으며, 죽은 반려견을 쓰다듬을 수도 있다. 시력이 영원히 사라져도 사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른 감각 체계의 도움으로 사는 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시각이 사라지면 다른 감각이 협동해 몸의 생존을 돕는다.
모든 것을 듣는 귀
인간이 듣는 주파수 영역 이상을 들을 수 있다. 50년 전 혹등고래의 언어를 듣고 쓰나미를 예측한 적이 있다. 원하는 주파수만 들을 수도 있다. 러시아와 미국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러시아의 잠수함 주파수를 파악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다만 귀는 뇌처럼 스위치를 달 수 없고, 열려있는 대로 흡수하기 때문에 많은 고통이 따랐다. 그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세균을 잡아먹는 장기 주머니
코선반과 목에는 가위개미처럼 세균을 정제하는 장기 주머니가 있다. 반투명한 연골 형태의 주머니는 코로나나 사스 같은 강력한 기생균을 잡아들이고 죽인다. 이는 가위개미의 줄기세포를 배양해 목에 주입한 것으로, 목에는 비슷한 세균 잡이 주머니가 포도처럼 여러 개 달려 있다.
돈을 벌어다주는 젖꼭지
기능을 상실한 젖꼭지는 점점 작아지고 퇴화했는데, 과학자들은 이 퇴화한 젖으로 필요한 자원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알아냈다. 거미 유전자를 이식해 거미줄 단백질이 든 젖이 나오도록 만들었고, 이것을 냉동한 후 해동해 거른 분말 용액으로 거미의 버팀줄처럼 가볍고 튼실한 실을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기절할 뻔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나 또한 거미를 혐오한다) 내 몸을 통해 나온 거미줄은 힘줄, 방탄 소재, 낙하산 로프 등으로 쓰인다. 그는 내가 엄청난 수입을 거둬들였다고 말했다.
그밖에 수염에 귀뚜라미가 스치는 찰나의 느낌만으로 공격할지 판단하는 땃쥐 유전자를 결합해 내 몸은 무적이 되었다. 작은 모기 한 마리조차 다가오기 전 죽임을 당한다. 코끼리 줄기세포로 양성한 암 억제 세포 P53를 지니고 있어, 주변 세포가 암을 알아서 죽인다. 내 몸속에는 진드기도 있다. 파라타르소토무스 마크로팔피스라는 엄청난 이름의 진드기는 1초당 자기 몸길이의 322배까지 이동할 수 있는데, 인간의 속도로 환산하면 시속 2,000km다. 위기가 닥치면 나의 발은 파라타르소토무스 마크로팔피스처럼 놀라운 달리기 실력으로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1초당 135걸음으로 달리기가 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유리개구리처럼 적혈구를 간으로 보내 몸을 투명하게 만들거나 완보동물처럼 몸의 1~3%정도의 수분만 남기고 ‘툰’이라는 탈수 가사 상태로 쪼그라든 채 얼마간 버티는 것도 가능하다. 지구에 행성이 떨어져 모든 것이 재가 된다 하더라도 한동한 내 몸은 우주에서 부유하다가 어딘가에 뿌리내릴 것이다.
편형동물의 재생 유전자를 주입한 내 몸은 일부가 망가져도 제법 빠르게 치료된다. 피부와 근육, 뼈 세포가 이전의 몸을 기억해 다시 비슷하게 재생하는 것인데, 조금 섬뜩한 사례도 들려 주었다. 내 몸을 분쇄기에 넣어 갈아버린다음 그것을 다른 인간에게 주입하면 나의 기억과 몸의 기능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맛있게 음식을 먹는 사람을 보면, 그 기쁨의 뇌파를 나의 뇌로 전달받아 배고픔의 감각도 잊을 수 있다.
“이제 슬픔을 감각하는 뇌신경까지 사라졌으니 당신은 이제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인간이 되었네요.” 그는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치켜세웠다.
나는 내가 분쇄기로 갈아버린 이전의 몸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뇌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내 세포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가족이 있었다. 내가 슬픔을 지워버린 이유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