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 피치*를 타고 올라간 지 5시간이 지났다. 바람은 친절하고 햇살은 부드러운 찬란한 날씨다. 10여 년간 클라이밍을 했지만, 확보자와 로프 없이 프리솔로로 암벽에 오르는 건 처음이다. 사람들은 무모한 행동이라고 혀를 찼고, 가족은 이해하지 못했으며, 친구들 역시 결정을 지지하지 않았다. 프리솔로를 계속한다면 그 끝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날 선 태양 빛 한줄기, 벌새의 날갯짓 한 번, 눈 위로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로 죽음은 온다. 외부를 인식하는 순간, 에고가 존재하는 순간, 죽음은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다. 인터라켄 서역에서 출발한 산악열차에서 스위스 산악인 율리 슈텍이 아이거 북벽을 마치 뒷동산 오르듯 단숨에 등정하는 영상을 본 적 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절벽을 오르는 지금의 나를 알고 있었다. 다만 율리 슈텍과 차이가 있다면, 내가 무엇을 오르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23피치에서 맨들거리는 석회암 종유석에 발 하나를 딛고, 아치로 이어진 크럭스를 뛰어 건넜다. 식물 덩굴과 떨기나무가 뿌리내린 아치 동굴에서 짭조름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마나 많은 피치가 더 남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나는 남국의 열대 어딘가를 수직으로 거스르는 중인 듯했다.
내 몸은 괜찮다. 나는 숨 쉬고 있다.
25피치는 20미터는 족히 돼 보이는 검은 현무암 덩어리였다. 풍화된 거대 바위는 볼링공처럼 밑동이 점점 좁아지는 형태로 올라갈수록 발 디딜 곳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미 수백 미터를 올라왔기때문에 손가락의 피로가 상당했다. 매끈한 바위를 짓누를 때마다 종아리가 바들바들 흔들거려 눈을 질끈 감았다. 미끄러지면 끝장이다. 상체를 최대한 바위 앞으로 바싹 붙이고, 엉덩이를 공중으로 치솟았다. 발바닥 앞쪽에 체중이 실려 보다 안정적으로 다음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발밑에는 브로콜리 모양의 식물이 빼곡하게 숲을 이루고 있고 중간중간 하마를 닮은 거대 바위가 뭉툭하게 솟아 있었다. 에베레스트가 율리 슈텍을 영원히 데리고 갔듯이, 나도 어떤 부름을 좇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수백 번 반복한 추락 시뮬레이션이 큰 도움이 되었다. 900m 절벽에서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노출 테라피’를 통해 죽음에 관한 공포심은 발끝으로 미끄러지는 무딘 감각이 되었다.
숨을 들이쉬고, 송곳 바위에 뒷꿈치 한 끗. 숨을 내쉬고, 손가락 하나.
숨을 들이쉬고 돌과 돌 사이. 숨을 내쉬고 엄지발가락 하나.
돌기 하나에 몸을 뉘고 전완근을 털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가 훅 내쉰다.
오직 이 순간, 이 우주에 검은 바위 홀드와 절벽에 붙어 있는 내 몸만이 존재한다.
나의 뇌는 오로지 몸에게 의지해 고요하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오롯이 순간만 집중한 시간이 한참 흘러갔다. 머리 위 울퉁불퉁한 바위턱 너머로 지평선이 힐끗거렸다. 튀어나온 화강암 위를 거슬러 오르면 드디어 절벽 너머의 땅이다. 나는 엄중하고 진지하게, 잔잔하고 평온하게, 길게 늘어진 말벌의 거대한 진흙집을 뛰넘고 수리매의 날렵한 활강을 무시하며 끝내 마지막 바위턱을 움켜쥐었다. 두 손으로 땅을 힘껏 누르고 오른 다리를 슬금슬금 안쪽으로 밀어넣자, 반쯤 뉜 몸이 땅으로 굴렀다. 지의류와 양치식물 무리가 무더기로 있는 평평한 초록의 땅이었다. 숨을 들이쉬면서 내 안에 환희를 보고, 숨을 내쉬면서 죄어오는 심장을 안았다.
손으로 땅을 훑었을 때 이곳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백골이 된 거구의 짐승 뼈, 작은 새의 두개골, 알 수 없는 형태의 무수한 뼛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원형으로 빙 둘러놓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 안에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대체 그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네스를 착용한 걸 봐선 산악인이 틀림없었다.
“당신은 누구요? 이곳은 어디와 연결된 거죠?”
“나는 저항하는 중입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예요? 난 방금 이 암벽을 타고 올라왔어요”
“나는 죽음을 애도하는 중이오.”
“누가 죽었단 말인가요? 암벽을 타다가요?”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나는 최대한 오래 애도함으로써 이 생명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게 나의 저항입니다.”
“누가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미안하지만 난 여기서 내려가고 싶어요. 하산 길을 알고 있나요?”
“클라이머는 멸종되고 있습니다.”
나는 그제야 그가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갈색 머리에 짙고 긴 눈썹, 뾰족한 콧등과 깊은 검은 눈은 틀림없이 율리 슈텍이었다. 7년 전 에베레스트 눕체산 절벽에서 추락해 사망한 전설의 산 사나이. 그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