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네시아 섬들을 취재하기 위해 타히티섬에 도착했을 때 내 항공권이 국내선 왕복 티켓 하나를 더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이드 테우루는 내게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이 살았던 마르키즈 제도가 유명하다고 말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야생마를 타고 원시림을 오르는 히바오아 섬 원주민의 삶이 궁금했지만, 어린 원주민 소녀에게 성병이나 퍼뜨리며 난잡한 생활을 한 고갱의 인기를 좇고 싶지는 않았다. 테우루는 모든 연인들의 꿈의 여행지라는 보라보라섬을 언급하다가, 아무래도 관광객이 적은 바히네 섬이 좋겠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았는데, 실은 이곳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커플들(그들은 조용해질 마음이 조금도 없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중에서는 평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 재산을 쏟은 성실한 노부부도 있었다.
“오, 그런 곳을 찾는다면 마침 파페에테 공항에서 ‘실망의 섬’으로 향하는 프로펠러 비행기가 있습니다. 다만, 언제 다시 비행기가 출발할지 모르니 신중하길 바래요!”
테우루가 말했다.
“왜 실망의 섬인가요?”
나는 실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진지하게 물었다.
“그곳에 처음 도착한 유럽인들이 그렇게 지었습니다. 아름다운 원주민 여인의 환대를 고대했다가 실망했을 겁니다. 원주민이 미친 듯이 달려와 커다란 창을 바다로 내리꽂으며 선원들을 위협했으니까요. 폴리네시아에서 평화로운 섬 중 하나랍니다. 그게 실망스러울지 모르겠군요.”
테우루는 20년간 그곳을 방문한 여행자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타히티섬에 남기로 했다.
경비행기에는 채소와 과일, 가공식품을 비롯해 의약품과 옷가지들을 담은 가방 여럿이 쌓여 있었다. 나는 유일한 승객이었다. 실망의 섬은 타히티섬에서 1,000km 떨어진 태평양 한가운데 있었다. 흰색 고리의 희미한 섬은 폴리네시아 유인도 중에서 가장 고립된 존재처럼 보였다. 모습을 드러낸 환초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실제로는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삼킬 것처럼 거대한 파도가 키큰 코코넛 나무를 둘러싼 석호와 부딪혀 하늘로 열렬히 솟구치는 중이었다.
작은 공항에는 미리연락 받은 섬의 시장, 후라이메가 나와 있었다. 그녀는 실망의 섬 식수가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강수량과 풍속 등 섬의 기후를 기록해 타히티섬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섬에는 약 40명이 거주하고, 조개를 수확하거나 코코넛 가공품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한다.
“기분이 어떤가요?” 후라이메가 말했다.
“기분은 좋습니다. 단지 목이 좀 마르네요.” 내가 말했다.
“기분이 좋다면 좋은 신호입니다. 이 섬은 기분에 따라 형태가 바뀌니까요. 이 길 끝에 머리가 넷 달린 코코넛 나무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수분을 섭취하면 됩니다.”
후라이메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섬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도로는 석호를 모래처럼 갈아서 만든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석호 가루가 별똥별처럼 반짝거렸다. 길 양쪽으로 똑같이 생긴 슬레이트 지붕 방갈로가 나란히 있고, 큼직한 야자수가 보기 좋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낮은 담벼락 너머 이방인을 향한 숨은 눈빛이 아른거렸다. 그렇다. 나는 20년 만에 이곳을 방문한 유일한 여행자다.
나는 다정한 환대를 받았다. 밋밋하고 짭조름한 코코넛 즙으로 갈증을 달랜 다음 생 조갯살을 코코넛 과육으로 버무린 샐러드를 곁들여 각종 생선구이를 얻어먹었다. 맨몸으로 야자수를 올라 코코넛을 떨어뜨리고 단도로 두 동강 내어 즙을 따라내는 능력은 이곳에서 그다지 놀라운 풍경이 아니다. 그물막 의자에 앉아있으면 핑크, 오렌지, 민트색이 뒤섞인 황혼의 파스텔 광선이 키 큰 나무 기둥 사이로 길게 떨어졌다. 한낮에는 우쿨렐레 연주와 감미로운 노래를 배경 삼아 자주 꾸벅꾸벅 졸았다. 환초로 둘러싼 투명한 바다에 몸을 담그면 레몬상어가 정강이를 툭툭 건드렸다. 미지근한 온풍 아래 나른한 잠을 청하고, 새하얀 모래에 물을 섞어 종일 둥근 공을 만들었다. 버려진 유리병의 입구로 공을 문지르면 도자기처럼 표면이 매끈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섬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말이 없고, 종종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럴 때면 나는 만타레이를 기다렸다. 바다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만타레이를 따라가면 망망대해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나는 폴리네시아 섬 중에서도 가장 환상적인 환초를 자랑하는 이 섬 전체에 드리운 무거운 침묵에 의문을 품었다. 이곳 사람들의 몸짓은 대체로 친절하지만, 먼저 말을 건네는 이가 없고 느리고 불투명했다. 인기척을 느껴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무성한 속삭임이 돌아다니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며칠 밤이 지났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새벽마다 만타레이가 나타나는 곳으로 길을 안내하는 모루로아가 나를 상대하는 유일한 원주민이었다. 후라이메의 아들인 그는 본인을 마흔 중반으로 소개했지만, 깊게 팬 주름이 드러날 때는 그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나는 이웃 섬인 팡가타우파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그곳의 격납고에서 운송 차량을 운전했죠. 하지만 이곳에서 팡가타우파는 금기어에요. 그곳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거든요.”
만타레이가 출몰하는 석호 안에서 모루로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고요한 섬에 무슨 끔찍한 일이요?”
나는 식인 풍습이 있었다는 마르키즈 제도와 창으로 이웃 부족의 머리를 찍은 다음 그 해골을 쌓아 마을의 경계선을 만들었다는 테아후푸의 전설을 떠올렸다. 뉴스에 등장하는 고립된 섬의 범죄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내 비행기는 8일 후에나 온다.
“엄청난 소리가 떨어졌어요. 사람들은 몸에 소리가 다다르기 전에 모두 한결같이 투명한 빛을 보았다고 말했어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니 빛이 투과해 뼈가 보일 정도였죠. 사람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고, 마을에는 일주일간 검은 비가 내렸어요. 바람을 타고 갬비어 군도까지 잿가루가 떨어졌어요. 그건 수십 년간 수백 번이나 계속됐어요. 아버지 몸에서는 죽은 피가 피부를 뚫고 계속 흘러 나왔죠. 결국 견디지 못했고요…” 모루로아는 섬에 사는 모든 이가 생존자라고 덧붙였다.
모두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왔는데, 대부분 소리의 열과 진동으로 목숨을 잃었고 지금까지 몸의 고통과 환청에 시달린다. 섬에서 무수한 시간이 흐르는 사이 그들은 말하는 법을 잃어버렸고, 침묵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고난과 상실의 아픔을 잊기로 한다. 이곳은 실망의 섬이 아니라 생존자의 섬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소리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몇몇은 겁에 질려 넋을 놓았고, 후라이메는 나의 행적을 먼 곳에 알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 소리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기때문에 팡가타우파는 형태가 없었고, 침묵과 침묵 사이에만 존재했다. 나를 데리고 가기 위해 비행기가 예정보다 일찍 섬에 도착했을 때, 그제서야 나는 모루로아를 통해 섬의 진짜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나푸카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집, 팡가타우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