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과 산 사이 흰 수평선으로 갑시다.”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 갓 구운 아침 빵과 야크 우유를 사러 가던 길이다. 파란 재킷을 입은 털보 아저씨가 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아침 빵을 손가락으로 뜯어 먹으며 한 청년에게 말한다.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현지 청년은 그곳은 꽤 멀고 가는 길도 험준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털보 아저씨의 삶은 어제나 그제나 5년 전이나 10년 후나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므로,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털보 아저씨의 대화를 계속 생각하느라 원숭이에게 습격당한다. 원숭이는 언덕으로 느리게 올라가는 내 속도를 미리 파악하고 친구들을 부르고, 양쪽에서 신호를 주고받으며 나를 연속으로 공격한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닌 귤 8개가 담긴 검은 봉지를 습격한다.
작고 귀여운 귤은 언덕 아래로 순식간에 굴러떨어지고 어디에선가 몰려온 그의 친구들이 귤을 모조리 채간다. 나는 있는대로 소리를 지르다가 바닥에 떨어진 풍선이라도 터뜨리려는 듯 발을 여러 번 힘차게 내리 꽂는다. 원숭이는 비웃는다. 이웃들도 비웃는다. 나는 귤을 잃고 빵을 소중히 챙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저 원숭이는 며칠 전 빨래하고 널어 둔 내 브레지어를 키 큰 나무 꼭대기에 걸어 놓은 녀석이다. 언젠가 나는 저 원숭이를 잡아다가 꼼짝 못 하게 결박한 다음 무리 앞에서 곤장을 힘차게 칠 것이다.
털보 아저씨와 나, H와 비구니 스님 둘, 그리고 부산한 데가 있는 젊은 사내까지 여섯 명이 청년의 차량에 오른다. 결기한 여행자들이다. 산과 산 사이 흰 수평선은 구름의 틈새처럼 보이고, 강처럼 보이고, 호수처럼 보이고, 그림자처럼 보이고, 빛처럼 보이고, 은하수처럼 보이고, 달빛처럼 보이고, 바위처럼 보이고, 바람처럼 보이고, 그리움처럼 보이고, 환영처럼 보이고, 양털처럼 보이고, 이끼처럼 보이고, 연기처럼 보이고, 과거처럼 보이고, 소리처럼 보이고, 아기처럼 보이고, 원숭이처럼 보이고, 귤처럼 보이고, 솜사탕처럼 보인다. 털보 아저씨는 새벽 빵을 먹다가 심심했을 것이고, 매일 다른 구름 속에 있는 먼 풍경이 궁금했을 것이고, 현지 청년에게 말을 걸고 싶었을 것이고, 트럭에 오르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쓰인 일기처럼 차례대로 각자의 자리를 잡고, 남은 빈 자리가 없던 젊은 사내는 트렁크에 쪼그리고 앉아 사과를 먹는다. 모두에게 아직 배고픈 시간이다.
2,000미터 고지의 험준한 산길은 사방이 잿빛 바위다. 트럭이 뿜는 먼지를 쫓아 마을 어린이 열댓 명이 한참 뛴다. 이윽고 멈춘 아이들은 소리를 내던지고 웃음을 뿌리고 이내 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왼편은 천길 낭떠러지이고, 오른편은 뾰족한 바위 절벽이다. 그 끝을 보려 해도 볼 수 없다. 느리게 달리는 차가 뒤뚱거릴 때마다 낭떠러지의 숨은 풍경이 슬쩍슬쩍 보일락 말락 한다. 이곳에서 추락하면 아무도 우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샛노란 햇살은 차창을 때리고, 길을 부수고, 침묵을 부른다. 산양이 가로지르고, 날개를 만개한 뇌조의 줄무늬 그림자는 어질어질하다. 건조한 모래가 코앞까지 이글거린다. 미지근한 시로코 바람 속에 있는 듯하다. 입에서 모래알이 씹힌다. 낡고 구멍 난 카시트에서 엉덩이를 온전하게 보전하기 쉽지 않다. 눈을 감으면 건방진 낙타에 앉아 바위 군락을 넘나드는 풍경이 보인다. 엉덩이는 까지고, 구토가 올라온다. 창 너머로 육중한 설산 근육이 겹겹이다. 전력질주하면 곰방이라도 닿을 것 같다. 산능선 면면에 핑크빛 보랏빛 연둣빛이 뒤섞인다. 하늘은 높고 청명하다. 몇 시간을 달리는지 모른다. 잠에 빠진다.
호수다. 살아 있으니 본다. 물길의 끝이 보이지 않아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수은을 녹인 것처럼 부드러운 은빛 물결이 일렁인다. 작은 자갈을 던지면 둥그런 파동이 고요하게 끝없다. 노란 유채꽃이 호반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다. 발이 쑥쑥 빠지는 늪을 걷는다. 바짝 말라 검게 갈라진 짙은 흙도 걷는다. 무수한 생명의 소리가 들리고, 무수한 죽음의 소리가 이어진다. 검은 피부의 노인이 작은 나룻배에 앉아 그물을 매만진다. 우리를 본다. 계속 본다. 청년이 노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한다. 현지어라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무슨 말인지 안다. 우리는 안쪽으로 들어갈 것이다.
노인의 피부는 깊게 주름지고 말라비틀어진 상태다. 드러난 몸피는 앙상하지만 단단하다. 노인은 우리를 나룻배에 태우고 힘겹게 노를 저어 은빛 호수 안쪽으로 향한다. 우리는 번갈아 노를 잡는다. 나의 서툰 손놀림에 배가 빙그르르 돈다. 모두 작게 웃고, 다시 먼 풍경을 본다. 풍경의 안쪽으로 나아간다. 호수는 압도적일 만큼 평온하고 경계가 없고 수직이 없다. 부드럽고 미끄러운 물결의 재배열, 반복되는 수평의 영원한 지속, 0의 형태로 돌아간 세상의 끝, 질서와 물리법칙이 사라진 텅 빈 혹은 영원히 비어 있을 무형의 상태. 그 안쪽으로 미끄러진다. 아름답고 우아하게, 투명하고 지극하게.
퐁!!!!
털보 아저씨가 호수로 입수한다. 물결이 요동치고 나룻배가 왁자지껄하다. 질서가 무너진다. 나는 깔깔거리고 웃다가 물속으로 사라진 털보 아저씨를 찾는다. 나는 배의 난간을 붙잡고 호수를 향해 고개를 박는다. 할 줄 아는 게 없는 나는 수평선의 흔들리는 물결을 탐색하느라 초집중이다. 털보 아저씨는 북쪽에서 두더지처럼 머리를 내뱉고, 이내 다시 사라진다. 고래의 꼬리 춤처럼 다리가 수면 밖으로 꼿꼿이 솟구치고 머물고 다시 빨려 들어간다. 수평선의 활이 되어 팔딱거린다. 이내 나룻배로 비밀스럽게 다가와 물방울을 튀긴다. 아저씨는 맨몸이었으므로 나는 부끄러워진다. 나룻배가 뭍에 올라와서도 아저씨는 한참 은빛 속에 머무른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으므로 손을 흔들어 아저씨를 부른다. 수평선에 빛이 쏟아지고 아저씨는 흐물거리는 형태로 아른거린다.
유채꽃에 뿔뿔이 흩어져 각자 길을 낸다. 스님들은 허리를 굽혀 꽃잎을 들여다본다. H는 말이 없다. 사내는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눈다. 방향은 모두 호수를 향한다. 이끌림 혹은 홀림으로 강력한 풍광에 눈이 멀어져 간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난다. 공간이 움직인다. 붉은빛이 가라앉는다. 유채꽃밭이 흔들린다. 바람이 흔들린다. 마음이 흔들린다. 말 없던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여 챙겨 온 주전부리를 꺼낸다. 야크 우유와 딱딱해진 빵, 스낵바와 아침에 내가 놓친 귤도 있다. 티베트 만두 모모와 도토리묵을 양념에 찍어 허겁지겁 먹는다. 우리는 나란히 눕는다. 하늘은 하얀 호수가 되어 고요한 너울을 만들고 나는 노래를 부른다. 콧노래다. 노래가 이어진다. 시가 이어진다. 평온이 이어진다. 기쁨이 이어진다. 눈물이 이어진다. 슬픔이 이어진다. 상실이 이어진다. 긴 날개의 새 한 쌍이 펄럭이며 지나간다. 눈을 질끈 감는다. 나룻배와 어부는 보이지 않는다. 아저씨는 물밑에서 수평선을 바라본다. 호수를 향해 들리지 않는 소리를 지른다. 아저씨는 운다. 미지근한 빛이 뺨에 닿는다. 눈이 감긴다. 시간이 증발한다. 공간이 찢어진다.
곧 해가 질 것이다. 빛이 사라진 밤에 험준한 절벽 도로를 달리는 행위는 곧 죽음이다. 나는 뒷걸음질치며 이곳에서 멀어진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할 것을 안다.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풍경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숨을 들이마신다. 마치 냄새를 폐에 담으려는 듯 깊게 견고하게 강렬하게. 어떤 풍경은 평생 다가오지 않는다. 어떤 풍경은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평생 듣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평생 춤추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평생 해방되지 않는다. 숨 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평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