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빙은 ‘뮌헨의 몽마르트’라고 말하기엔 스산한 서늘함이 있었다. 모두가 우울증에 걸린다는 11월의 짙은 계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낙엽이 대부분 떨어진 가로수는 메마른 검은 가지만 남은 채 동면에 들어갔고, 사람들 표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누구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유럽의 늦가을을 나 역시 싫어하면서도, 은근히 그 폐허의 공기가 나쁘지 않다. 그저 모두 따뜻한 남국으로 사라지기를, 쓸쓸한 벤치에 홀로 앉아 나는 진짜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온전한 내 문장으로 ‘쓰기’에 돌입하기를. 그래서 아주 고독한 집중으로 그 다른 어떤 것도 뇌에 침입할 수 없기를. 그렇게 스스로를 냉기의 황야로 떠미는 것이다. 하지만 추위는 매번 적응하기 힘들다.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독일의 추위란… 정말이지 지독한 폐렴으로 죽어간 수많은 작가들의 비틀어진 등골을 떠올리게 한다. 생각이라는 것을 부여잡고 있다가, 이내 추위에 굴복하여 부르르 떨며 미지근한 라디에이터가 있는 그 어디라도 찾아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온기 가까운 곳에 앉아 글뤼바인으로 몸을 녹이고, 여백이 보이는 공간에 빼곡하게 낙서를 하다가 마지막 손님으로 밖을 나선다. 그래봤자 저녁 8시지만.
그렇게 슈바빙을 혼자 어슬렁거린 지 3일이 지났다. 가난한 예술가 지구라 불리던 고대의 시간은 사라진 지 오래 되었고, 근사하게 차려입은 키 큰 남녀들이 꼿꼿하게 아주 빠른 속도로 흘러 지나간다. 그들은 자작나무처럼 긴 다리를 지녔는데, 내 옆을 지날 때마다 찬 바람이 쌩 불었다. 정말 그들에게서 바람이 나왔다. 영하 10도는 되었을 것이다. 사실 슈바빙에 온 것은 오래 전 이곳에 홀연히 유학을 떠나 온 고 전혜린 작가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다식한 지적 아름다움과 다부진 검은 눈동자를 동경했는데, 그것은 지금껏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낀 강렬한 질투의 감정이다. 나는 나의 일부가 그의 몸을 빌어 부활한 것처럼 그의 여정을 따라 거대한 포플로 가로수가 늘어진 레오폴드가를 투박하게 걷고, 영국 정원의 잿빛 안개 속을 유랑했다. 그가 말한 ‘보헴의 정신’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시월이었다. 하늘의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척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 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안왔다. 열쇠로 방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갔다. 그때 마침 가스등을 켜는 시간이어서(5시경이었던 것 같다) 제복 입은 할아버지가 가스등을 한등 한등 긴 막대기를 사용하면서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내가 구라파를 그리워 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맙소사. 가스등이라니. 구라파라니! 가스등이 사라진 영국 정원에는 비어 가르텐이 제일 눈에 띄었지만 외로워보이는 백조만큼은 책 속 풍경 그대로처럼 보였다. 안과 밖의 경계가 희미한 뿌연 호숫가에서 그는 여기저기 모여 있는 흰 덩어리를 고독한 자신의 처지와 닮았다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젊은 호기심과 다시 없이 절실했던 고독을 그리워했다. 나는 개똥 금지 푯말을 지나쳐 백조와 검고 노란 오리들이 옹기종기 모인 호숫가 앞 녹색 벤치에 앉았다. 사실 우아한 이미지와 달리 백조는 좀 경박하고 못된 구석이 있다. 먹이를 던져 주면 먼저 강탈해야 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고수하며, 종종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본인보다 몸집이 큰 인간에게 성을 내고 공격 자세를 취한다. 백조는 처음에는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가, 내가 청둥오리에게 빵조각을 던져주었을 때서야 ‘뾱뾱’ 거리면서 뭍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당장 빵조각을 주지 않으면 널 쪼아버리겠어’ 하는 자태로 꽥꽥거리며 저지레했다. 아주 오만하기 그지 없다. 나는 안개비와 구라파적 가스등을 떠올리며 그의 시간 속에 있다가, ‘에잇!’ 하며 벌떡 일어나 자리를 떴다. 구라파의 백조야 안녕.
영국정원을 나와 근처에 있는 제로제Seerose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배가 고팠고, 추위가 몰려왔고, 더는 보헴의 정신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너무나 외롭다는 생각이 밀려와 무엇이라도 먹어서 배를 든든하게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로제 레스토랑은 전혜린이 외로움을 달래며 즐겨 찾던 식당이자, 예술가의 집합소였다. 예를 들어, 어떤 날은 시인의 밤이었고, 어떤 날은 화가의 밤이었으며 흑발의 스모키 화장을 한 여류 시인이 예술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거나, 작가들이 창가에 앉아 종일 담배를 피우며 글을 쓰는 그런 풍경이 벌어지는 곳.
“그 집의 한쪽 벽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사진이며 편지며 분필사인이 토마(Ludwig Toma)니 링겔낫츠(Ringelnatz)니 케스트너(Kaestner)니 (Siegfried Sommer)니 하는 쟁쟁한 작가나 화가나 만화가들의 소행인 것도 알게 되었고 이 집이 한때 반 나치 운동의 중심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제 아이힝가라는 여류 시인의 존재를 그 여자의 특이한 용모와 매력적인 긴 흑발과 함께 알았다..."
제로제 레스토랑은 스페인 식당으로 변해 있었다. 예술가들의 집합소이던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이름과 공간이 바뀌지 않은 채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흥분 되었다. 더군다나 건물 외벽에는 소설가 토마스 만이 이 건물에서 5년간 살았으며, 그곳에서 소설 <Buddenbrooks>를 완성했다는 푯말이 걸려 있었다. 나는 토마스 만이 식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미간을 찌푸린 채 사색에 몰두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몇십 년 후에는 전혜린이 구석에 앉았고, 이제는 내가 서있는 것이다. 마치 공간이 어떤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진 사람들을 끌어 모으듯이 말이다. 맙소사.
나는 헤페바이첸 맥주 500mL을 요청한 다음 하몬과 빠에야, 꼴뚜기 튀김을 이어 주문했다. 낮은 조도의 붉은 색 조명등이 흐르는 공간은 따뜻하고 다정했으며, 스페인어를 쓰는 종업원은 내게 명랑하게 말을 건넸다. 나는 당최 한 단어도 알아들을 수 없어 웃기만 했다. 그는 곧이어 작은 클래식기타를 연주하며 식탁을 돌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빠른 박자의 플라멩코 리듬이 나오자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추임새를 던졌다. 바닥을 두들기며 박자를 맞추던 사람들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가볍게 움직이며 춤을 췄다. 내 몸은 촛불처럼 자그맣게 흔들렸다. 종업원은 한참이 지난 이후 내게 다시 와 스페인어 억양이 섞인 독일어로 다시 말을 건넸다. 이번엔 잘 알아들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네, 전 한국에서 왔어요.”
“오! 한국! 당신 알아요. 맞죠! 그 사람 때문이죠!”
날 안다고, 하는 말은 나 같은 사람들을 안다는 뜻이었다. 그는 나처럼 전혜린의 여정을 쫓아 슈바빙의 제로제 레스토랑까지 온 한국 여성이 몇 명 있었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 무수한 전혜린이 있었던 것이다. 가스등 아래 외로운 벤치에 앉아 백조에게 빵조각을 던지고, 제로제로 흘러 들어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좇는. 나는 바이에른 맥주를 3잔 더 마시고 레스토랑을 빠져 나왔다. 더욱 짙어진 안개 속에서 가스등이 하나씩 켜졌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는 레몬색 불빛 아래 전혜린의 유령이 되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흐르는지 모르고.
“휴식과 포도주에 넘친 어둠,
슬픈 기타 소리가 흐른다.
그리고 방안의 부드러운 등불로
꿈속처럼 너는 돌아간다.”
* 본문 속 흘림체 문장은 전혜린의 산문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발췌한 문구들입니다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