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우박을 피해 작은 산장에 들어왔다. 산장에는 중년 등산객 한 명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우박은 밤송이처럼 크고 단단해서 그대로 머리에 맞았다간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 산장은 1천 미터가 넘는 수목한계선에 있었는데, 실상은 개미집이 퍼져 있는 곳이었다. 낡은 지도와 필기구, 플라스틱 물병과 찢어진 장갑 등이 널브러져 있고, 초침이 멈춘 둥근 벽시계가 벽에 걸려 있었다. 오랜 시간 대피소로 쓰였다가 방치된 건물처럼 보였다. 지붕에 총알처럼 떨어지는 우박 소리 때문에 금세라도 건물이 폭삭 주저앉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찾아 우박이 멈추기를 한참 기다렸고, 챙겨 온 음식들을 나누어 먹었고, 서로를 돌보면서 가끔 농담을 던졌다. 조금씩 긴장이 풀렸지만 우박은 그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하지요. 그래도 이렇게 크고 단단한 우박은 난생처음입니다만…” 등산객이 말했다.
“또 어떤 일이 있는데요?” 나는 호기심 있는 눈빛으로 물었다.
“겨울 트레킹을 하다가 길을 잃은 적 있습니다. 눈보라가 심하게 불었고, 새하얀 눈이 뒤덮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죠. 낭떠러지인지, 길인지 전혀 알 수 없었어요.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외침은 허공을 맴돌고, 두려움에 압도되어 한 발짝도 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당시의 나를 본다면, 전설의 설인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대로 눈덩어리가 되었으니까요. 눈보라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고, 먼 곳을 향해 소리만 질렀습니다. 이 길이 맞다면, 누군가 날 발견할 것이다, 소리를 들을 것이다, 생각했죠. 그러나 오직 바람 소리만 들렸어요. 방향을 잃고 요동치는 바람이었죠. 나 이외 생명이라곤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얀 밤이 몰려왔을 때 스스로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덥고 졸렸어요. 재킷을 벗고, 잠이 들었을 때 검은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그림자는 재빠르고 컸어요. 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엄청난 힘에 의해 몸이 붕 떠올려지는 것을 느꼈는데, 질질 끌려가다가 여러 번 눈 위를 굴렀던 것도 같습니다. 그림자는 사람의 형태라고 말하기엔 크기가 지나치게 크고 몸피는 두꺼웠어요. 그다음 기억은 산 정상의 대피소입니다. 사람들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새벽에 대피소 앞에서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안으로 데리고 왔다고 했어요. 난 아직도 내가 어떻게 그곳에 있는지,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등산객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가 눈보라 속에서 만난 것이 몸의 의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대피소 앞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다음은 내 차례였다.
“독일 북부의 황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곳은 헤더라고 불리는 연보랏빛 야생화가 집단으로 서식하는 히스 들판이 펼쳐진 곳이었어요. 저는 소나기 들판이라 불리는 그곳을 좋아했습니다. 독일 작가 아르노 슈미트가 살아 있을 때 늘 이곳을 산책했다고 들었거든요. 히스 들판을 걸으면 그의 난해한 문장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죠. 조류보호구역이라 접근이 제한적이었고, 덕분에 인간의 간섭 없는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가로지르는 데에 큰 용기가 필요했어요. 늑대와 곰이 종종 나타난다는 경고 푯말이 있었거든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곰 스프레이를 챙겨 주위를 살피며 들판 안쪽으로 걸었습니다. 태양 광선이 들판을 따뜻하게 내리쬐면 드넓은 황야의 바람을 따라 꿀 냄새가 불어왔습니다. 짙은 녹색의 습지 식물과 흰색 줄무늬의 물푸레나무가 근사한 대조를 이루었죠. 그때였어요. 촘촘하게 직조된 하얀 그물이 습지를 이불처럼 덮고 있었어요. 안쪽에서 튀어나온 가늘고 긴 털이 공중을 향해 뾰족하게 솟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각도에 따라 지푸라기 덩어리처럼 보였고, 혹은 날선 비늘같기도 했어요. 바람이 불면 느리게 흐느적거렸고요. 조금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나는 하마터면 주저앉아 소리 지를 뻔했답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백골이 된 곰들이었어요.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한 무리의 죽음이 쌓여있었습니다. 땅에 닿은 부분은 헤더 덩굴이 뜨개질한 것처럼 감싸고 있었고, 몸통 굴곡을 따라 새하얀 균사가 촘촘하게 길을 내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크기의 균사가 곰을 먹어치우고 있던 셈이죠. 태어나서 그렇게 큰 버섯 군락은 처음이었어요.”
그때 산장 문을 거세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산악구조대원들이었다. 그들은 곧 낙뢰가 몰려올 것이라 말하며 이곳에서 빨리 나가야 한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머리 정면에 헤드렌턴을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산장을 빠져나와 대피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는 붉은색 헬리콥터가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대피소로 달려가며 균사에게 잠식당한 히스 들판의 곰 무리를 생각했다. 몸에서 흰 비늘이 솟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곧 낙뢰가 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