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었습니다.”
문 앞에 서있는 안 박사는 짐작한 것보다 훨씬 젊은 용모였다. 머리카락이 양쪽 귀와 목덜미를 뒤덮고 있었고, 투명 안경테 너머 작은 눈빛이 미지근하게 보였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공간을 분주하게 두리번거리고는 눈에 보이는 의자에 검은 가방을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조금은 안절부절못해 보였다. 반면 난 그가 일면식 없는 내 메일을 확인하고 황급히 초대를 수락했다는 사실에 무척 상기되어 있던 차였다. 내가 보낸 메일 내용은 이렇다.
[ 고대 삼엽충에 관한 당신의 연구 발표 기사를 잘 읽었습니다. 그간의 연구 노고에 깊은 경의를 보내며 일반인으로서 멸종 시기를 가장 많이 극복한 삼엽충의 진화 방식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혹은 시간이 된다면 제 사무실에서 글뤼바인 한 잔과 청양고추를 곁들인 라클레트 치즈를 대접하고 싶습니다만. 고대 삼엽충에 관해 목적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수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요. ]
약 2분 30초 후 도착한 회신 :
[ 수요일 저녁 7시가 좋습니다. 나 이외에 다른 손님은 없어야 하며, 사진 촬영과 녹음처럼 기록 행동은 삼가 주십시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당신은 비밀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까? ]
안 박사의 의뭉스러운 질문과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골몰했다. 그가 살인자이거나 사이코패스처럼 예측 불가한 위험인물이라면? 단둘만 있는 사적 공간에서 나는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두려운 생각이 올라왔지만, 그의 마지막 질문에서 나는 안전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내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이다. 그것은 40억 년 전 삼엽충이 가스로 뒤덮인 땅의 근육을 기어다닐 무렵부터 일어난 어떤 순간이 분명하다. 고생물학자들의 영원한 루머 중 하나를 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비밀을 잘 지키는 사람이며,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다고 답장했다.
취리히 미그로스에서 사온 2인용 라클레트 그릴과 와인으로 테이블을 그럴싸하게 세팅하고, 청양고추와 통통한 알감자를 수북하게 쌓았다. 빈티지 촛대에 제주에서 챙겨 온 밀랍초를 올리니 비밀의 책을 공유하던 중세 연금술사의 방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각자의 신분을 밝히고 와인을 나누고 치즈를 구워 먹었다. 그는 대체로 말이 없고 종종 촛불을 응시했으며, 자주 의자에 늏은 자기 가방을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나는 그가 이야기꾼이 아니어서 당황스러웠다. 앨프레드 월리스처럼 개인적 일상과 이국의 생경한 모험담이 하나로 혼합된 흥미진진 서사 따위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삼엽충은 가장 오래 종을 유지한 생명체인 거죠? 40억 년 동안 무려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는데 말이죠. 이 작고 징그러운 바다생물만 끈질기게 살아남았다니 정말 대단해요! 삼엽충은 인류 생존과 진화 비밀에 중요한 단서가 될 거예요.”
나는 삼엽충에 관한 얄팍한 지식을 쏟아내며, 안 박사의 공감과 인정을 기대했다. 나는 그가 삼엽충 대화에 흥미를 보이는 것 같지 않아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노력했거든요. 천적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크게 키우고 근육을 늘리고 동종을 잡아먹으며 근사한 골격을 만들었죠. 대멸종이 올 때마다 감각기관을 정교하게 변형했어요.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 했지만, 결과는 대부분 죽음이었습니다. 몸부림친 몸들은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번데기처럼 몸을 굴린 채 고요하고 평범하게 진화한 작은 삼엽충만이 세대교체에 성공했습니다. 3억 년을 살아냈어요. 지구 생명체의 90%가 멸종한 마지막 대멸종 전까지 말이죠.”
안 박사가 라클레트 치즈를 뒤집으며 담담하게 말했기 때문에, 이 엄청난 이야기가 동화처럼 느껴졌다. 나는 부천 골동품 아저씨 창고에서 사들인 삼엽충 석회암 화석을 꺼내 안 박사에게 보여주었다. 길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촉수가 집게처럼 큼지막하게 달려 있고, 등에 뾰족한 뿔이 촘촘히 박힌 삼엽충. 그의 설명에 따르면 결국 죽음에 이른 변종일 테다.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고난에 맞서 무수한 몸으로 변화한 삼엽충. 반대로 웅크리고 숨으며 버티는 삶을 선택한 삼엽충.
“사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안 박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온 가방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올리고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가 일반인이라는 사실에 용기를 내었다고 말하며 네모난 가방을 펼쳐 보였다. 안에는 손바닥만 한 투명 아크릴박스 하나가 단출하게 들어 있었다. 박스 천장에 동전만 한 구멍 세 개가 뚫려 있고, 그 안에 돌이끼처럼 보이는 검고 작은 것이 움찔거렸다. 맙소사, 살아있는 건가? 촉수는 카리부 뿔을 뒤집은 모양으로 머리에 붙어있고, 다리는 새의 날개뼈처럼 곡선으로 뻗어 있어 언뜻 해파리처럼 보였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디크라누루.. 스 몬스트로수스!!!
“줄여서 몬스터라 하죠. 모로코 사하라에서 발견했습니다. 공항 검색대도 통과했어요. 나를 비롯해 모두 화석인 줄 알았으니까요. 일주일이 지났을 때 연구소 책상에 있던 삼엽충의 다리가 이전의 자세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툰 상태라고 하죠. 스스로 수분을 날려 세포 활동을 멈춘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툰 상태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4억 년 전 살았던 삼엽충이었다. 맙소사, 멸종한 몬스터가 내 앞에 있다. 검고 뾰족한 생명체에는 미세한 털이 달린 눈(이라고 추측되는)이 세 개 달려 있는데, 그중 두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사방을 감지하듯 천천히 나선형으로 움직였다. 안 박사는 챙겨 온 분무기로 꼬리에 난 가시들에 이슬을 만들고 안부를 물었다. 조금 전까지 심드렁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갓난아기를 대하듯 소중한 태도로 몬스터를 살뜰하게 챙겼다.
“몬스터가 정말 살아 있는 상태라면,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진실이 그들의 피부와 장기 조직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을 거예요. 이건 엄청난 혁명이라고요! 왜 세상에 알리지 않는 거죠?” 나는 흥분한 상태로 말했다.
“저는 그동안 수많은 동물이 연구실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몬스터는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을 겁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목격했고 생존했어요. 우리는 허가 없이 그들에게 죽음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인류는 삼엽충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삼엽충의 고통을 생각해야 합니다. 먹히고, 불태워지고, 뼈가 녹아버리면서 그렇게 수 세기 몸을 계속 바꾸는 동안...”
안 박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우는 것인가? 나는 그가 고생물학자보다 시인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함께 오래 앉아 있었다. 몬스터의 꼬리 가시가 1mm 움직일 때마다 소소한 환호와 탄식을 보냈고, 나는 그의 지글거리는 라끌레트 치즈 위에 말없이 청양고추 조각을 올려 주었다. 밀랍초가 반쯤 줄어들었을 때 나와 안 박사는 큰 포옹을 나눴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