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과 함께 모든 빛이 사라졌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던 경고음 소리는 잦아들었고, 인터넷과 전화 모두 불통이었다. 지진으로 뒤틀린 도로에는 희미한 가스가 피어오르고, 마을의 반이 무너졌으며, 태양 자기장의 이상 현상으로 모든 전자 기계가 멈췄다. 외부 소통의 도구가 사라진 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고난이 걷히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종종 커다란 담벼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마다 길 잃은 존재들이 돌림노래처럼 울부짖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우리의 삶은 이대로 멈춰버린 건지 몰라, 나는 중얼거리며 반려견 쿠루를 꼭 껴안았다.
“알래스카 여행을 갔을 때 기억 나? 슈퍼에 물을 사러 들어갔다가 무스가 들어와서 주저앉았잖아.” 루이가 뭔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맞아, 무릎이 풀려버린 거야. 무스는 팝콘을 먹고 갔어. 고작 쳐들어와서 한다는 것이 인간의 팝콘을 훔쳐 먹는 일이었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같은 추억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나는 얼마 전 숲속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작은 고라니 한 마리를 떠올렸다. 고라니는 미래를 보았을까? 작은 생각들이 사슬처럼 엮이고 복잡하게 이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창가의 진궁나무 분재에 물을 주고, 지난밤의 달콤한 꿈을 생각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 사이로 빌딩만 한 크기의 은빛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꿈이었다.
“바라나시에서 돌고래를 보았다고 말한 적 있었나? 정말 큰 돌고래였어. 새벽 태양의 붉은 빛이 반짝거려서 핑크 고래처럼 보였어. 두 번 튀어 오르고 저승의 섬으로 사라졌지.” “우리 같이 제주도에서 돌고래 무리를 만났잖아! 첫날 도전은 실패하고, 둘째 날에 나타났었는데. 수십 마리나! 정말 엄청났어.” “당연히 기억나! 맨 앞에 가던 돌고래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세 번 연속 점프를 해댔어. 마치 이리로 와, 이쪽이야, 하고 지휘하는 것처럼 말이야. 우리는 말문이 막혀 푸른 바다를 오래 바라보았어.” “쿠루도 짖는 걸 멈췄지.” “아니야, 엄청 짖었어. 하하하.” 우리는 크게 웃었다. 쿠루는 전용 방석에 턱을 대고 엎드려 동그랗고 큰 검은 눈을 굴려댔다.
불안한 마음 상태와 달리 바깥은 고요하기만 했다. 통신 마비를 동반한 일시적 해프닝일 수도 있다. 어떤 순간에 문득 전기가 다시 들어오고 세상과 연결 되면, 안도하고 투덜거리며 다음 일상을 시작하면 되는 거다. 우리는 땅콩호박과 고구마를 불 위에 올리고, 최대한 가까이 모여 앉았다. 잣죽 냄새가 달큰하게 흘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는 늘 압력밥솥으로 잣죽을 해서 기다리고 계셨어. 왜 늘 잣죽이었나 몰라, 비쌀 텐데 말이야. 근데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싫었던 적이 없었어. 잣죽이 단 한 번도 싫증난 적 없었어. 냉면 그릇 한가득 담아서 잘도 먹었다니까. 할머니는 특별히 내 그릇에만 잣 고명을 올려 주었어.” 내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잘 먹으니까 그렇지. 잣죽을 잘 먹으니까 할머니가 늘 요리하신 거 아닐까?” 루이가 말했다.
평생 채식을 한 할머니는 의사가 칭찬할 정도로 팔순을 넘은 나이에도 무척 건강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너네만 맛있는 거 먹냐!’ 하며 성내며 고기를 빼앗아 먹기 전까지. 할머니가 저승으로 가던 날, 나는 리겐스부르크에 있었다. 함께 있던 사촌언니는 간밤에 할머니 꿈을 꾸었다고 말했고, 다음 날 오전 할머니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나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눈물도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르고서야 내 꿈에 나타났다. 말 없이 나를 지긋이 바라 보았다. 할머니, 나를 용서해 주세요.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과 북한산을 갔는데 말이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주 신났던 거야. 아주 오랜만에 함께 한 여행이었거든. 그렇게 뛰어다니다가 좁은 길이 나왔는데, 한쪽이 천 길 낭떠러지였어.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피하려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져 바위 경사면으로 순식간에 미끄러졌어. 몸이 반쯤 내려갔을 때 어떤 손이 쑥 내려와 내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어. 건장한 중년 남성이었는데 무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는 땅에 내 두 발이 닿은 것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사라졌어. 그 아저씨 아니었으면 나는 추락해 죽었을 거야.” 루이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추락하면 얼마나 아플까?” 내가 말했다. “바보야, 추락하면 그냥 죽는 거야. 운이 나쁘면 사지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겠지.” 루이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근데 말이야, 추락하지 않아도 그런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잖아. 타들어 가고 펄펄 끓어오르는 피가 심장을 찢어버리는 고통 말이야. 평생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근육이 녹아버리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도 있는 거야…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억울할까?” 나는 상실의 지옥도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토록 무서운 순간들이 나를 통과하지 않은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건 재앙이네. 사는 것이 재앙이야.” 루이가 말했다. “그렇지만 어떤 고통은 고귀하기도 해. 어둠 속에 빛이 탄생하는 것처럼.” 내 말에 루이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고통이라면 누구라도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별은 처음이었어. 안나푸르나로 떠나는 첫째 날이었는데 숙소 화장실이 바깥에 있었거든. 너무 추워서 몸이 바짝 오그라든 상태로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니타가 나를 보고 손전등을 꺼보라는 거야. 전원을 끈 그때였어. 수천 아니 수억만 개의 작은 불빛이 촘촘히 박힌 세상. 그 엄청난 세계가 머리 위 전체에 퍼져 있었어. 점점이 박힌 빛이 내 눈 속으로 쏟아지던 황홀한 어둠. 그 전율이 아직 내 피에 흐르고 있어” 나는 그 이후로 그와 같은 밤하늘을 본 적 없다. 그런 경험은 일생 단 한 번 찾아온다. 어떤 사람은 평생 만나지 못한다. 진짜 경험은 오직 몸으로 온 감각으로 경험한 사람만이 정확히 안다.
그때 다급한 속도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관 둘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모두 무사한가요?”
“네, 모두 무사합니다.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우리는 안전한가요? 나가도 되는 건가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입니다.”
“.... 고구마를 좀 드시겠어요?”
루이의 말에 경찰 둘은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쿠루가 한참 짖었고, 그들은 모자를 벗었다. 지친 모습이었다. 나는 고구마를 한 개씩 접시에 덜어 나누어주었다. 경찰관 1은 고구마를 손으로 반을 잘라 통째로 입에 넣었고, 잠시 머뭇거리던 경찰관 2는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긴 다음 조금씩 잘라 먹었다. 허공에 고구마를 먹는 소리가 느리게 퍼졌다.
“맛있습니다.” 경찰관 1이 말했다.
“고구마는 진안이 맛있습니다. 저희 고향이거든요.” 경찰관 2가 말했다.
“이건 태안에서 왔어요. 이게 마지막 고구마에요.” 내가 말했다.
쿠루가 얌전히 앉아 고구마를 바라보았고, 먼 곳에서 산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지막 남은 고구마 반쪽을 쿠루에게 준 다음, 나머지를 다시 반쪽 내어 루이에게 건넸다. 루이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정말 맛있네요, 이 고구마. 정말 맛있어요.” 내가 고구마 조각을 먹으며 말했다.
하늘에서 불빛이 환하게 떨어졌다. 거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