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간의 양떼 목장을 지날 때만 해도 아주 보통의 겨울날이었다. 왼발은 아이젠을 착용해 얼음 땅을 지지했고, 오른발은 왼발과 허벅지에 의지해 방향을 잡았다. 이럴 땐 먼저 지나간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이 길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경사가 심하지는 않았으나, 한 번은 마음을 단디 잡고 오르막 고개를 꼬박 넘어야 했다. 풍경의 안쪽에는 사스래나무가 순백의 뱀처럼 구불구불 지나가고 있었다. 세찬 바람은 눈두덩이를 냉혹하게 때리다가도, 겨울 볕을 만나면 황홀한 손길로 변해 언 뺨을 어루만졌다. 산행 경험이 많은 S가 나를 한참 앞서가는 바람에, 나는 먼 점처럼 보이는 그의 검은 등만 쫓아야 했다. 배낭이 숨을 짓누르고, 바람은 몸을 정교하게 부수었다. ‘H’가 쓰인 비상 헬기장을 지나 짧은 평지에 들어섰다. 먼 고원에서 육중한 크기의 풍력발전기가 흩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부~우웡 철컥!!!!!!! 부~우우우우엉 철컥!!
정상에 이르렀을 때 규칙적 굉음의 진동이 절정에 달했다. 몸을 구부려 나를 휘감는 모든 움직임에 저항해야 했다. 칼날 같은 산바람과 가늠할 수 없는 공포, 자연의 무자비함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고개를 겨우 들었을 때, 머리 위에서 금속 마찰 소리와 함께 길고 검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지나갔다. 오직 눈앞의 큰 기둥만이 그것이 풍력발전기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눈보라는 모든 것을 안개처럼 희미하게 만들었지만, 나는 내 머리 위에 축구장만 한 크기의 금속 날개가 바람을 가르며 휘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비박을 해야겠어.” S의 말에 우리는 신속하게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전기 기둥 주변은 고원에서 가장 바람이 덜 부는 곳이었다. “날개에서 고드름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S는 바람에 휘어지는 폴대를 간신히 붙잡으며 말했다. 머리 위로 무언가가 철썩거리며 날아갔다. 알록달록한 색을 보아 누군가의 텐트나 타프임이 분명했다.
우리는 알파인 텐트 1개에서 함께 하루를 견디기로 했다. 내가 폴대를 텐트 안쪽에 설치하는 동안 S는 텐트 바깥쪽에서 캐노피가 무너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해 형태를 잡아주었다. 폴대 위치를 잡고 한쪽이 무너지지 않도록 공을 들이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풍력발전기의 무시무시한 소리가 뒷골까지 달라붙었다. 배낭과 신발을 비좁은 텐트에 몰아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안전해.” 내가 힘없이 말했다. S는 밤새 텐트가 날아가지 않도록 밧줄로 묶어야겠다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나는 우리가 무게를 지탱하고 있으니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며 붙잡았다. “괜찮을 거야.” S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바람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텐트 바깥에서 출입 지퍼를 끝까지 올리며 무어라 말했지만, 바람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헤드랜턴이 연두색 텐트에 새겨진 검은색 로고를 이리저리 비추었고, 나는 흔들리는 폴대를 손으로 잡으며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눈을 감으면 바람 소리가 잦아들었다. 다시 눈을 뜨면 바람의 노여움이 사정없이 텐트를 방망이질했다.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그곳은 귀신이 우는 고원입니다. 정상에 박힌 말뚝은 길을 영원히 막아버렸습니다. 혼령들은 그곳을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죽은 몸들이 휘감고 우는 바람 골짜기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흥미로워합니다만, 소리가 된 그들의 모습을 직접 보면 얘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들은 주로 강풍이 심하고 눈이 내리는 겨울에 많이 목격됩니다. 소리는 흙탕물 속에 가라앉은 돌멩이 같아서 어떤 순간까지는 아주 지극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바람이 온몸을 투명하게 통과하는 순간, 바람 속에서 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일 겁니다. 그것을 마주한 이들은 공포심이 극에 달해 독영경에 빠지거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뇌가 세포벽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치 벼락에 맞은 것처럼 근육이 녹아버리죠. 그것도 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소리는 바다 한가운데에 솟은 검은 성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 의식은 미니어처 전시물을 구경하는 관람객처럼 성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새카만 그림자가 전부인 성은 웅장하고 높았으며,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쩌렁쩌렁 따랐다. 각 방 안에는 죽은 몸들이 쌓여 있었고, 바깥에서는 검은 바다와 흰 파도가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복도 끝에 미세한 연둣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곳에 이르렀을 때 우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파고들었다. 그 안에는 총 맞은 토끼와 얼굴 반쪽이 사라진 아이, 온몸이 녹아버린 사내와 썩어버린 발가락이 있었다. 겹겹이 쌓인 몸들은 일부만 튀어나와 정체를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나는 알 수 없는 으스스함과 함께 깊은 슬픔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어 올라 장기가 녹아내리는 고통이 나를 덮쳐왔다. 모든 슬픔이 거기 있었다. 눈물이 흘러 바다를 이루었고, 폭탄 소리와 함께 울부짖었다. 의식은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와 허공으로 올라왔다. 연기처럼 꼿꼿이 서서 슬픔으로 가득 찬 검은 성을 내려다 보았다.
“일어나! 해가 뜨고 있어.” S였다. 연두색 텐트에 밝은 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나는 S를 와락 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나 말야, 엄청난 걸 봤어! 그게 이 바람 속에 뭐가 있냐면 말이야..”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빨리 철수하자. 이젠 한순간도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S가 신속하게 배낭을 챙기며 말했다. 고원에는 형형색색 텐트들이 이곳저곳에 찢어진 채 흩어져 있었다. 내 배낭의 레인커버도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장비들이 날아가지 않도록 주머니에 단단히 여며 배낭 깊숙이 눌러 넣었다. 빠뜨린 것이 없는지 땅을 찬찬히 훑은 다음 묵직한 배낭을 어깨에 들쳐 멨다. S는 이미 하산할 준비를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텐트를 고정하려고 밖으로 나갔을 때 말이야, 불 타는 연기를 봤어. 바람 때문에 온갖 것이 흔들리는데, 그 연기는 꼿꼿이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지 모야. 순간 너무 놀라서 잠시 정신을 잃었다니까.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아.“ S가 절뚝거리며 힘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바람이 느리게 잦아들었고, 나는 그가 다시 걷지 못할까봐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