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갔을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초록 물결은 이곳이 바다인지, 끝없는 호수인지 혹은 그 경계인지 점점 모호해진다. 부드럽게 일렁이는 물결을 열세 번 넘었을 때 보트 엔진이 꺼졌다. 배가 더 들어갈 수 없어 허리춤까지 차오르는 물속에 들어가 뭍까지 두 다리로 가야 한다. 따뜻한 남태평양 온기가 온몸에 수렴되고, 때때로 불어오는 미풍이 나른한 졸음을 밀고 왔다.
반짝거리는 빛은 바위를 뒤덮은 죽은 산호와 굴들의 몸이다. 발가락에 잔뜩 힘을 쥐고 날카로운 표면의 산호 화석 바위를 내디딘다. 자칫 몸이 쏠리기라도 한다면, 칼날 같은 바위 조각에 무릎을 다 베일 것이다. 이국의 풍광에 혼을 빼앗기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눈을 꼿꼿이 뜬다. 물속과 달리 바깥 태양은 이글이글한다. 대기를 뚫고 그대로 살을 파고들 듯 강렬하다. 뜨거운 햇살 아래 흰제비갈매기 그림자가 큰 그림자를 만들고 휙 지나간다. 움직임을 쫓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친다.
“서둘러야 해, 보트는 우리를 오래 기다리지 않을 거야.” 올리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탐조의 시간이 길고 화려한 올리버는 탐조 장비도 남다르다. 그의 팔뚝만 한 망원렌즈에 치이지 않으려면 1m는 떨어져 걸어야 할 정도다.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새의 이름을 알아내느라 바쁜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조류 탐험가이지만, ‘난 아무것도 몰라, 넌 정말 최고야’ 하는 눈빛으로 질문을 던지면, 아주 상세하게 새에 관한 정보를 쏟아낸다. 며칠 전에는 그의 뒤를 슬그머니 쫓다가 희귀종 소라게를 발견하기도 했다. 수줍음이 많기 때문에 정말 만나기 어려운 아이다.
우리는 13명으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바다새 여행단’(가이드가 급하게 지었다)으로, 오늘 아침 숙소 로비에서 우연히 결성되었다. 원주민이 ‘버드 아일랜드’라 부르는 이 섬은 너무나 작은 라군이라 지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 나는 섬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으면 위기에 닥쳤을 때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우리들의 가이드는 충분한 경험이 있고, 파도를 거슬러 바다의 땅을 개척한 폴리네시아인의 유산이니 그를 믿기로 한다.
이름대로 새들의 땅이었다. 그들은 인간이란 종족을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경계심이 전혀 없고, 너울의 진동보다 더 큰 소리로 섬 전체를 흔들었다. 낮은 덤불이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게 엉클어진 숲으로 들어가자 부드러운 모래에 발바닥이 스폰지처럼 내려앉았다. 섬 전체가 모래땅이었다. 모래에 뿌리 내린 작은 갯바위 식물들이 긴 매듭을 잇고, 땅 위의 덤불 가지엔 새 둥지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이곳에만 희귀 조류 십여 종이 서식합니다. 검은제비갈매기와 갈색얼가니새가 가장 많은 군을 이루죠. 보통 나뭇가지에 둥지를 만들어 알을 낳고, 라군에서 물고기 사냥을 합니다. 쉿! 저기 나뭇가지 위에 어미를 기다리는 어린 흰제비갈매기가 있네요. 아직 나는 법을 몰라 저렇게 하염없이 어미 새를 기다리는 겁니다.” 탐조 가이드가 관목 아래로 몸을 낮추며 소곤거렸다. 어린 흰제비갈매기는 새카맣고 작은 눈동자를 지녔고, 검고 오동통한 부리가 귀여웠다. 모래땅에서 1m도 안 되는 높이의 가지에 무방비 상태로 앉아 어미 새를 종일 기다리는 중이었다.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가 손을 뻗으면 금방 닿는 거리, 은빛 솜털이 사방으로 사뿐거리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다.
“아 잠깐만! 더 다가가지 말아요. 알이 있어요. 아기새가 놀라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알이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올리버가 양팔로 우리의 발걸음을 저지하며 말했다. 유리알처럼 작은 크기의 알 하나가 얼기설기 쌓은 나뭇가지 사이에 끼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나는 어쩔 줄 몰랐지만, 접착제로 부착한 듯 흔들림이 없다. 어쩌면 보이는 것과 달리 그들만의 안전장치가 장착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손이 닿을 만큼 낮은 키의 나무 틈에서 새들은 그들 나름의 질서와 균형을 지키며 평온하게 성장하는 중이다. 천적과 인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저 나무 꼭대기를 보세요, 붉은발얼가니새가 있어요. 몸집이 아주 크고 목이 굵습니다. 이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닷새랍니다.” 가이드는 붉은발얼가니새를 보면 행운이 온다는 말도 덧붙였다. 온갖 새들의 즉흥 불협화음 속에서 독보적 크기와 순백의 화려한 외모로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붉은발얼가니새는 나무의 제일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그곳에 우아하게 앉아 섬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털모자를 쓴 불긋한 얼굴과 통통한 몸매가 펭귄과 닮아 보였다. 양쪽 날개를 활짝 펼치니 그 길이가 1m는 족히 넘어 보였다.
우리는 정해진 구역 내에 흩어져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올리버를 따라 새들의 발자국을 기록하고, 작은 폭포수 앞에 누워 온갖 소리를 들었다. 생경한 이국의 새들이 머리 위에서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며 움직이는 동안, 올리버는 수백 번의 셔터를 눌러대느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잘 나온 사진 한 장 줄래?” 나는 뻔뻔하게 그의 노고를 요구했고, 그는 흔쾌히 그 자리에서 몇 장을 내게 전했다. 그중 한 사진에서 붉은발얼가니새가 붉은 물갈퀴로 폭신한 모래를 밟으며 한쪽 몸을 뒤뚱거리고 있었다. “훨쭉이. 이제부터 얘 이름은 훨쭉이야. 훨쭉이.” 나는 이름을 지어준 다음, 붉은발얼가니새를 향해 내 이름을 알려주며 나를 소개했다. 올리버는 한심한 것을 본 듯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새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훨쭉아, 잘 지내!”
다시 보트로 향하는 라군에는 얕은 수심에도 불구하고 레몬 상어가 작은 물고기를 잡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강이에 상어 지느러미가 스치긴 했지만, 물고기를 먹고 사는 작은 레몬 상어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으니 겁낼 필요는 없다. 투명한 바다 안에서 나른하게 움직이다 보니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라군 너머로 화석이 된 산호에 부딪히는 하얀 파도와 야자수 그늘이 아른거린다. 멀리 보트에서 선장이 팔을 느리게 흔들며 손짓한다. 깰 시간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