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북천이 흐르는 상선로 네 번째 블록 회색 집 401호에서 10년을 살았다. 동남향 방향으로 큼지막한 창이 난 작은 원룸이다. 동쪽 창 너머를 바라보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고, 시끄럽게 혼잣말하는 긴 머리 여성이 늘 같은 시간에 버스를 기다린다. 생각이 많은 날엔 상북천을 산책하며 어슬렁거리다가 럭키슈퍼에 들러 먹을거리를 사 들고 집에 온다. 밤 10시가 지나면 지나가는 이가 거의 없는 조용한 주택가다. 10년쯤 한 곳에 살면 몸은 느슨해진다. 지하철역 1번 출구로 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300m가량 가다가 징검다리를 건넌 다음, 다시 두 번째 블록을 지나 왼쪽으로 몸을 돌리면 최종 목적지다. 지나치는 가게를 지나치고, 당연히 보는 사람을 보고, 평범한 이웃들의 몸짓은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몸은 내 머리보다 이 구역을 더 잘 알고 있다.
옆 건물 교회의 집사는 내가 얼굴을 기억하는 첫 번째 이웃이다. 우리 건물 주차장과 교회의 뒷문이 연결되어 있어서 집사는 교회 건물 안에서 고개를 뺀 채 주차 상황을 확인하거나, 낯선 이가 함부로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는지 유심히 살핀다. 문제가 발생하면 쏜살같이 현장에 나타나 묵묵하게 일을 처리한다. 이 모든 것이 집사의 당연한 임무처럼 보인다. 스테인드글라스 창 안쪽에서 바깥을 주시하며 어슬렁거리는 실루엣을 보면,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나는 그를 주차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가벼운 목례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데, 집사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헛기침만 던지고 교회 안으로 사라진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용모에 지친 얼굴을 지닌 그가 실제 ‘집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편의를 위해 ‘집사’라는 호칭으로 부를 뿐이다. 집사 덕분에 주차장에 쓰레기를 투척하거나, 슬쩍 주차하는 외부 차량은 거의 없다.
비가 많이 쏟아지던 여름날, 아래층 여자가 우리집 문을 강하게 두들겼다. 근처 대학교를 다니는 여학생이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도움을 청했다. 그와 함께 내려간 건물 유리문 앞에 아주 작은 고양이가 부들거리면서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새끼 고양이는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고 연약했다. 눈도 뜨지 못한 작은 몸은 사력을 다해 울부짖었고, 울음 소리는 빗줄기를 뚫고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그제야 집사의 표정을 똑바로 보았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난 그의 검고 명확한 동공과 빠르고 주저 없는 몸짓, 수건으로 고양이를 조심스레 감싼 다음 곧바로 전력을 다해 뛰는 뒷모습,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집사의 등에 흰 독수리 그림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우리는 점점 멀어지는 흰 독수리를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래층 학생이 우리집 현관문을 다시 두들겼다. 그의 품에서 새끼손가락만 한 다리에 깁스한 고양이가 꼬물거렸다. “다리가 부러졌대요. 근데 너무 아기라서 수술 못 하고 뼈가 붙을 때까지 한동안 보호대를 차고 기다려야 한대요. 집사님이 데리고 왔어요..” 여학생은 자신이 돌볼 생각이라며, 내가 궁금해할까 들렀다고 말했다. 다행이었다. 나는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편하게 문을 두드리라고 말하며 고맙다고 덧붙였다.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요, 고양이는 계단을 어떻게 올라갔을까요? 메인 현관문까지 높은 계단이 있잖아요, 이 부러진 작은 다리로는 절대 못 오를 텐데.. ”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어미 고양이가 걷지 못하는 아기를 구하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을 청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처럼 집사의 뒷모습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장마가 지나고 더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울리던 찬송가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집사의 모습도 신기루처럼 희미해졌다. 아래층 여학생은 주차장 한 켠에 고양이 물품을 잔뜩 버리고 말없이 이사를 떠났다. 나는 새끼 고양이의 상태가 무척 궁금했지만, 바쁜 일상을 살아내느라 새로운 사건이 지난 기억을 덮어 나갔다. 내가 새로운 직장 근처로 이사 가던 날, 문득 집사의 안부가 궁금했다. 교회 뒤편을 기웃거렸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동네를 떠났고, 5년이 지나서야 루이와 함께 동네를 다시 찾았다. 나는 어슬렁거리던 상북천과 혼잣말하는 여자를 기억해냈고, 루이에게 교회 집사의 모호한 행방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소리야, 그건 교회가 아니라 공연장이잖아. 일요일 아침에 들린 건 찬송가가 아니라 공연 소리였다고.” 루이가 놀란 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 돼, 그 교회 집사가 고양이를 구했잖아. 기억 안 나? 비 오는 날 다리 다쳐서 안고 뛴 거?” 나는 한층 더 큰 소리를 질렀다. 루이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눈으로 나를 의아하게 쳐다 봤다. “고양이를 구하다니 무슨 소리야, 아래층 학생이 다리 다친 거 말하는 거야? 내가 응급차 부른 거?” 우리가 서로 기억하는 과거가 전혀 다르다는 것에 혼란스러웠다. 말다툼이 끝없이 이어지다가 이대로 날을 샐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휴전하고 자주 가던 상선동막걸리 주점에 가서 화해하기로 했다. 원형 양철 쟁반 가운데 연탄불을 내어 고기를 구워내는 집이다. 건물 뒤편으로 이어진 마당에 가면 ㄷ자 한옥 구조의 별채가 나오고 사람들은 각 방에서 술과 요리를 밤새 즐긴다. 루이는 씩씩거리는 나를 진정시키며 모둠 구이와 막걸리 1병을 주문했다. 그가 별채 구석에 있는 후미진 화장실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등에 프린트된 그림이 보였다. 흰 독수리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