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흡연 여행자로 전액 현금 선지급 가능하며, 조용하고 깔끔한 편입니다. 일정과 조건 등 모두 맞추겠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당장 보러 갈 수 있을까요?”
책으로 꽉 찬 책장과 아치형 창 4개, 천장고 높은 방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메일을 보냈다. 베를린에서 머물 곳을 찾고 있었다. 유학 생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안전하고 깨끗하며 가성비 좋은 방을 찾느라 며칠을 고군분투하던 중이었다. 가격은 나쁘지 않았고, 글솜씨가 점잖았다. 방학 동안 한국을 방문하게 되어, 그 기간 머물 사람을 찾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쯔뷔쉔미테zwischenmiete라고 하는데, ‘쯔뷔센’은 이것과 저것 사이, ‘미테’는 임대를 뜻하므로 ‘사이’ ‘중간’ ‘낀’ 시공간을 대여하는 셈이다.
답변은 바로 왔다. 공동 부엌을 사용하는 대학 기숙사 건물의 방이었다. “티브이는 봐도 되는데, 컴퓨터는 사용하지 말아요. 중요한 작업이 있으니까. 그래도 이 방이 건물 전체에서 제일 크답니다. 누구나 탐을 내는 코너 룸이고.” 진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남자가 방을 안내하며 말했다. 진은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미학을 공부하는 유학생이었다. 작은 키에 무테안경을 쓴 모습이 유연하고 지적으로 보였다. “운이 좋았죠. 공동 부엌을 쓰는 친구들은 모두 여덟 명인데 문짝에 매일 담당하는 일이 쓰여 있어요. 감자나 바나나 같은 걸 먹게 된다면 채워놓아야 해요. 냉장고는 내 이름이 적힌 박스를 사용하면 됩니다. 방학이라 여행을 떠난 친구들이 많아요. 부엌은 한가할 거예요.” 진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구리색 열쇠를 보여주며, 문 위 튀어나온 작은 턱에 올려놓겠다고 말했다. 그사이 나는 낀 시공간 사용료를 건넸다. 우리는 2주 후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기숙사 건물은 중정을 중심으로 빙 둘러 있는 ㅁ자 구조인데, 일부가 다른 건물의 복도와 연결되어 미로처럼 복잡했다. 3층으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난 복도를 따라 끝까지 간 다음 작은 원형 계단을 따라 두 층을 오르고, 중문 너머로 이어진 왼쪽 복도로 다시 걸어갔다. 그 길에서 공동 부엌을 지났는데, 내가 슬쩍 시선을 보내자 대화가 멈췄다. 난 턱을 튕기며 내 존재를 알리고 마침내 301호 앞에 섰다. 손을 뻗어 문 위 선반을 더듬거리니 열쇠가 잡혔다. 지금까지 이런 무거운 구리 열쇠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맥주 한 병을 마시며 느릿느릿 방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벽 한 면 전체를 메운 책장에는 한글과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그리고 알 수 없는 알파벳 조합의 책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대부분 인문학 주제의 장서이고, 드물게 기호와 보충 그림이 있는 과학 도서도 보였다. 검은색 배경의 보르헤스 전집과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가지런히 꽂혔고, 구석에 클래식 기타 교본이 눕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파 겸 침대 옆에 반들반들한 기타가 세워져 있다. 이케아 스탠딩 조명등이 가장 밝게 비추는 사이드 테이블에는 짐빔 병에 꽂은 흰 양초가 반쯤 녹아내려 있었다.
나는 기타를 들어 소파에 앉았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코드 몇 개로 현을 건드렸다. 형편없다. 그러다 문득 내가 베를린자유대학을 다니는 유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옷장에 있는 진의 옷을 한쪽으로 최대한 밀어내고 내 옷을 걸었다. 책상 위 작은 물건들을 보이지 않는 구석에 치우고, 내 노트북과 일기장, 펜을 보기 좋은 구도로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아주 익숙한 자태로 아치형 창 앞에 앉아 다르질링 홍차를 홀짝거렸다. 빛이 참 좋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창 앞에 잠시 놓은 컵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 찻물이 바닥으로 옮겨 놓은 진의 컴퓨터 위로 쏟아졌다. 나는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서둘러 닦아냈지만, 기계 속으로 스며든 찻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진이 컴퓨터 사용에 단호하게 주의를 준 사실이 떠올라 당황스러웠다. 책장에 놓인 탁상 액자에는 진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큼지막한 청바지와 플란넬 셔츠를 입고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액자를 뒤집으며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고의가 아니었어요.’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진한테 들었어, 난 게오르그야. 진이 부엌 식탁에 있는 곡물빵과 요거트를 먹어도 된다고 전하랬어. 나는 곧 고향으로 떠나거든! 어쨋든 이 낡고 진부한 동독 건물에 온 걸 환영해. 부활절의 행운을 차지하기를!” 게오르그가 사과 하나를 다부지게 먹으며 말했다. 나는 게오르그의 짙은 녹색 티셔츠에 쓰인 글씨, ‘All is Well’에 눈을 고정한 채 먹통이 된 컴퓨터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 맞다! 내가 쓰레기는 치웠어!” 그는 그대로 반대편 복도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구겨 신은 스니커즈 뒷부분에 뒤꿈치 살이 선명히 보였다. ‘젠장, 행운은 무슨!’
공동 부엌에 멍하기 앉아 있는 동안 데보라가 나를 발견했다. “안녕, 오늘 어땠어?” 그는 내가 이 건물에 처음 들어설 때 공동 출입문을 열어 준 친구다. 나보다 키는 훨씬 작은데 눈은 5배는 커서, 조금 기이하게 보였다. 식빵처럼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어 나를 바라보고 말하는 건지 헷갈렸다. 나는 대충 괜찮다고 둘러대며 진의 컴퓨터를 계속 생각했다. “오늘 저녁 강당에서 부활절 콘서트가 있어. 집으로 가지 못해 우울증에 빠진 학생들을 위한 위로 공연이지. 그래도 이번엔 스페인 음식이 차려질 거라고!” 데보라는 무언가 끊임없이 말했지만, 소리는 내 귀에 닿지 않았다. 진은 박사 공부를 하는 사람이니 컴퓨터에 중요한 자료나 논문이 있을 것이고, 나는 그의 엄청난 노고를 어이없게 망친 것이다. 내가 물건을 제멋대로 옮기고 내 것으로 대신 채우지 않았더라면, 유학생이 된 기분에 취해 창가에서 차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데보라에게 이끌려 부활절 콘서트로 향했다. 콘서트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겨우 열다섯 명 남짓 모여 있었다. 지하 창고 한편에 무대를 만들고, 스페인 요리 몇 가지로 작은 뷔페가 차려져 있었다. 고향으로 떠나지 못한 유학생들은 교회 음악을 합창하고, 클래식 기타 앙상블을 연주하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들은 독일 겨울의 쓸쓸함과 유학생의 높은 자살률에 관해 진지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안고 눈빛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들이 서로를 챙기는 모습에 감동을 받으면서도, 내가 한 번도 향수병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사뭇 놀랐다. 데보라가 내게 부활절의 행운을 기원하는 동안에도 나는 홀딱 젖은 컴퓨터를 떠올리며 자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튿날 일찍, 전화벨이 울렸다. 진이었다.
“혹시, 내 컴퓨터를 켠 적 있나요?”
“네? 아니요, 켠 적 없어요. 건든 적도 없는걸요. 제 노트북이 있는데 내가 왜 쓰겠어요. 테이블은 뭐 거의 손댄 적도 없답니다.”
“아 네, 한 번 물어본 거예요.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요.”
“아니요, 미안할 건 없어요… 그냥 그렇다고요.”
“다시 한번 부탁이지만, 컴퓨터를 켜지 말아주세요. 그뿐이에요. ”
짤막한 대화였다. 나는 진이 왜 이른 아침 전화해서 느닷없이 컴퓨터에 관한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방 안에 몰래카메라라도 있는 것일까, 내가 컴퓨터를 망가뜨린 것을 알고 있는 걸까, 왜 컴퓨터 전원을 켜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지? 복잡한 마음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동시에 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공동 부엌으로 가려고 방문을 열었을 때 발끝에 어떤 물건이 걸렸다. 비닐 포장지로 감싼 작은 바구니였다. 바구니 안에는 연한 핑크, 코발트블루, 노란색으로 물들인 부활절 달걀과 토끼 모양의 초콜릿, 버터 쿠키와 알사탕 등 귀여운 스낵들이 보기 좋게 담겨 있었다. 알아보기 힘든 글씨체로 ‘Happy Easter!’ 라고 쓴 작은 카드와 함께. 나는 복도로 박차고 나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적막만이 흘렀다. 복도를 서성거리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온 순간 찌릿거리는 전기 흐름을 강하게 느꼈다. 부웅- 탁! 소리와 함께 컴퓨터 전원에 불이 켜지고 모니터 빛이 방 전체를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