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점의 산문시 딜리버리입니다. 매주 수요일 보내드려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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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점입니다.
지난 배달글에서 말씀드린대로 세 번째 번외편 <보이지 않는 여행들> OST 를 보내드립니다. 모두 인상적으로 본 영화의 수록곡입니다. 마음에 드시길 바라며^^ 본문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애플 뮤직 플레이리스트로 연결됩니다. 무엇보다 우점의 산문시 배달을 구독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하단의 링크 아이콘을 클릭하시면, 발행한 지난 글들을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
2024년 6월 14일 금요일 우점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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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보이지 않는 여행들> OST vol.3
_ 다시 여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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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광사설 春光乍洩> 1997 _ 카에타누 벨로주 “Waterfall Cucurrucucu Paloma”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이 다투는 샷이 끊어지고, 이어 모든 것을 쓸어 담을 듯 광활하게 쏟아지는 이구아수 폭포. 악마의 입처럼 아휘와 보영의 감정을 잠식하는 흰 물줄기는 그 어떤 영화보다 강렬한 오프닝 씬으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시각적 압도와 함께 나지막이 이어지던 현악기 선율이 영화 전체의 정서를 모두 드러내는 것 같았죠. 브라질 보사노바 뮤지션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o)가 부드러운 저음으로 ‘쿠쿠루쿠쿠-’하고 노래할 때, 그 선율이 지니는 그리움과 처연한 슬픔 때문에 묵은 감정이 올라오기도 했답니다. 노랫말을 전혀 모르는데도요. 이 노래는 페드로 알모바도르의 영화 <그녀에게>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TMI지만, 이 노래를 너무 좋아해 반려견 이름을 ‘쿠쿠루쿠쿠’라 지었답니다. 포르투갈어로 비둘기 우는 소리죠.
왕가위 감독의 음악은 언제나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한층 깊이있게 혹은 처절하게 극대화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속에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아스트로 피아졸라 음악에 감응을 받아 부에노스아이레스 밀롱가로 탱고를 배우러 가고 싶을 정도였죠. 결국 떠나지 못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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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 1995 _ 고란 브레고비치 “Wedding - Cocek”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 <언더그라운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는 것을 모른 채 20년간 지하에서 무기를 만들어 땅 위로 보내며 살아가는 유고슬라비아(현 세르비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에는 코체크(Čoček)라 불리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군악대에서 유래한 브라스 밴드 장르의 음악이 끊임없이 흐르는데요, 흥겨운 리듬과 서늘한 슬픔의 정서가 뒤섞이며 감정을 요동합니다. 코체크는 현재 소수민족에 의해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해요. 주로 마을 결혼식과 축제에서 이 코체크 음악과 함께 온 마을이 들썩이는 풍경이 벌어지죠. 영화에서도 지하 세계의 ‘정신없는 축제’이던 결혼식 장면에서 코체크 밴드의 브라스 연주가 멋들어지게 펼쳐집니다. 음악이 나오자마자 절로 어깨 관절이 풀리고 함께 움직이는 놀라운 경험을 한답니다. 음악은 에밀 쿠스트리차의 오랜 파트너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가 맡았습니다. 코체크 음악은 환상과 초현실 사이를 줄타기하며 영화의 비극적 서사를 더욱 극적으로 만듭니다.
영화 마지막 블랙키가 독백하는 대사는 제게 강렬한 시로 남아 있어요. “가장 비극적인 전쟁은 형제와의 싸움이다.” 내전이야말로 세대로 이어지는 트라우마로 몸 전체에 각인되는 듯합니다. 모든 등장인물이 다시 나와 기쁨의 춤을 함께 추는 환상의 엔딩씬은 계속해서 찾아볼 정도로 엄청난 감동입니다. 꿈 같은 축제 장면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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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니핑크> 1995 _ 에디트 피아프 “Non, je ne regrette rien”
독일의 대표 여성 감독인 도리스 되리의 영화 <파니 핑크>를 기억하는 사람은 적지만, 아마 이 명대사는 들어봤을 겁니다. “여자 나이 서른에 좋은 남자를 만나기란 길을 걷다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20대였는데, 이 대사를 보고 ‘서른’이라는 나이가 엄청 상징적으로 다가왔죠. 서른 살이 되도록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곁에 없다면 정말 큰일이 나는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서른이란 나이는 얼마나 젊고 싱그러운 숫자인가요!
원제처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스스로를 비관하고 사랑을 갈망하는 ‘파니 핑크’에게는 독특하고 다정한 이웃이 있습니다. 바로 ‘오르페오’라는 이름의 심령술사입니다. 오르페오는 공허한 마음에 휩싸이는 파니 핑크의 진실한 조언자이자, 백인 중심 독일 사회에서 가난한 흑인 게이로 살아가는 아프리카 이민자죠. 파니 핑크의 서른 살 생일날, 오르페오는 해골 모양의 코스튬을 입고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Non, je ne regrette rien>를 립싱크로 불러주며 그녀를 위로합니다. 서른 개의 초를 꽂은 큼지막한 케이크를 들고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오르페오의 모습을 보고 전 생각했죠. 아니, 파니 핑크는 저렇게 멋진 친구가 있는데 어째서 자꾸 사랑 타령이나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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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트레인 스포팅> 1996 _ 이기 팝 “Lust For Life”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트레인 스포팅>은 영화만큼이나 수록된 OST 리스트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과거의 훌륭한 뮤지션이 대거 참여했거든요. 특히 마크 랜튼 역할의 이완 맥그리거가 질주하는 첫 장면에 흐르는 이기 팝의 <Lust For Life>는 데이비드 보위가 작곡과 기타 연주에 함께 하기도 했죠. 그 밖에도 블러, 펄프, 루 리드 등 1980~1990년대를 대표하던 뮤지션들의 반가운 음악들이 등장합니다.
대니 보일 특유의 뮤직비디오 같은 감각적 영상과 단편 형식의 편집, 펑크 브릿팝이 많은 호응을 받았는데, 개인적으로 헤로인이라는 강력한 마약에 중독되고 회복하는 과정의 무시무시한 실상을 전면으로 경험한 영화였어요. 특히 루 리드의 <Perfect Day>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면서 세상 더러운 변기에 온몸이 빠져버리거나, 금단 현상 때문에 천장에 붙은 아기의 목이 돌아가는;; 등의 환각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죠. <Lust For Life> 역시 이기 팝이 약물중독 경험을 바탕으로 쓴 노래랍니다. 역동의 에너지가 가득한 펑크 뮤직인데, 러닝이나 청소를 할 때 틀면 도움이 됩니다. 프로지디가 리믹스한 곡도 함께 들어보세요. 접신이 가능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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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수지의 개들> 1992 _ 조지 베이커 컬렉션 “Little Green Bag”
1992년에 개봉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역대급 데뷔작이죠. 그의 범죄 누와르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저수지의 개들> 오프닝 씬을 많이 기억할 겁니다. 조지 베이커 컬렉션의 <Little Green Bag>은 영화 포스터 그대로 검은 수트와 타이,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오만하고 다소 위협적으로 걸어오는 패거리 장면에서 나온 음악입니다. 하비 케이틀이 성냥개비를 잘근거리는 클로접 씬은 홍콩 누와르 시리즈의 주윤발을 오마주했고요. 영화 속 음악 모두 쿠엔틴 타란티노가 직접 음악적 취향대로 넣었다고 하죠.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폭력성과 반항적이고 의연한 펑크록, 심리적 갈등이 드러난 교차편집, 정말 어떤 복선도 아닌 그저 수다로 이루어진 롱테이크 씬은 타란티노만의 고유한 장르가 된 것 같습니다. ‘이유 없는 악’의 캐릭터 ‘미스터 블론드’가 경찰을 고문할 때 나온 Stealers Wheel의 <Stuck in the middle with you>도 인상적이었죠.
대체 타란티노 폭력성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그의 어머니가 경찰 고문 장면을 좋아한다고 하니 가족 내력일지도 모르겠네요;; 또한 총 272번의 욕설 ‘F***’이 나왔다고 하는데 말이죠. 국내 개봉할 때 연령 제한 논란이 끊이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어쨋든 음악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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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바그다드 카페> 1993 _ 제베타 스틸 “Calling You”
이국적 배경을 환경 삼아 낯선 두 명의 인물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하고 성장하는 로드무비 형식을 좋아하는데요, 독일 출신 퍼시 애들론 감독의 <바그다드 카페>가 딱 그렇습니다. 코닥 필름 특유의 짙은 명암과 사막의 건조한 톤이 두 인물의 관계 변화에 따라 자연스레 바뀌는 공간 분위기가 오래 여운으로 남습니다. 광활한 미국의 사막 지대에서 흔하게 만나는, 지루하게 생기 없는 가게를 운영하는 흑인 여성 브렌다와 그냥저냥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데요, 이곳에 갑자기 귀엽게 통통한 여성 야스민이 등장하며 변화가 시작됩니다. 야스민으로 인해 지저분한 가게가 멀끔해지고, 이웃들은 웃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서로를 공감하며 다정해지죠. 초라하고 나약한 일상을 사는 소외된 여성이 서로를 지지하고 힘이 되어주며 긍정적 삶의 태도로 공간과 사람 전체를 변화시키는 그 여정이 아름답습니다.
제베타 스틸리 부른 <calling you>는 엔딩 장면에서 야스민과 브렌다가 재회할 때 흐르는 곡이자 영화의 주제곡입니다. 여성의 우정과 관계를 다룬 이 세밀한 영화를 남성 감독이 연출했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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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러브레터> 1995 _ 레미디오스 “A Winter Story”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를 처음 보았던 고등학생 당시 전 도무지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가지 못해 반복해 봐야 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후지이 이츠키아 이 후지이 이츠키고, 저 후지이 이츠키가 아니라고? 근데 히로코가 후지이 이츠키는 아니고? 뭐야 대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교차 편집때문이지만, 죽은 연인의 동창이자 같은 이름을 가진 후지이 이츠키의 감정을 공감하기 쉽지 않았죠.
다만 하얀 눈밭에서 먼 설산을 향해 울부짖던 히로코의 떨리는 목소리, 커튼 너머로 부서지는 햇살 아래 보일 듯 말 듯하던 청년 후지이 이츠키의 옆모습, 어린 시절 이츠키들이 자전거를 타고 함께 달리던 풍경,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 뒷면에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벅차오르는 표정을 짓던 후지이 이츠키. 그리고 그녀의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같은 장면이 꿈처럼 파편처럼 남아 있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졌을 때 꺼이꺼이 오열하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저의 중학생 시절도 떠오르네요. 일본 싱어송라이터인 레미디오스의 <A Winter Story>를 들을 때면 그 영화를 보았던 그 순간의 감정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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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8요일> 1996, 루이스 마리아노 “Maman La Plus Belle Du Monde”
<제8요일>은 가족이 분열되고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아리가 요양원에서 막 탈출한 조지를 우연히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닮고 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볼 때 어린 나이였는데, ‘장애’라는 것, ‘정상과 비정상’에 관한 사회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기억이 납니다. 아리와 조지는 각각 가족에게 거절당하고, 사회에 거절당하는 현실과 직면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돌보게 됩니다. 특히 조지의 영혼은 아리의 서늘한 마음을 흔들고, 조지 없이는 안 되는 마음에까지 이르게 하죠. 더욱이 가족과 오해를 풀고 연결 짓게 만들고요. 영화는 어렵게 흐르지 않습니다. 조지의 투명하고 순수한 표정과 대사들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가슴을 찡하게 만들기도 해요.
조지와 아리가 함께 허름한 모텔에 숙박하게 될 때 침대 밑에 생쥐가 나타나는데, 갑자기 생쥐가 포마드를 잔뜩 바르고 느끼하게 노래하는 가수 루이스 마리아노의 모습으로 ‘펑’ 변신합니다. <Maman La Plus Belle Du Monde>는 바로 루이스 마리아노가 조지에게 불러주는 노래이자, 엄마를 그리워하는 조지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시입니다. ‘엄마, 세상에서 가장 예쁜 바로 당신 / 주의의 어떤 여인도 더 예쁘지 않아요… / 내 모든 여행지에서 나는 풍경을 보았어요 / 하지만 어떤 것도 아름다운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당신의 모습에 비할 수 없죠 … /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무너질 때 / 엄마, 당신, 당신은 바로 거기에 계시는군요.’ 명랑한 리듬으로 노래하는 마리아노와 평온하게 행복한 조지의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슬프고도 현실적으로 그려져 충격을 받기도 헸어요. 조지의 환상 속에 나타난 엄마가 전한 말은 종종 제게도 큰 힘이 됩니다.
“넌 내가 가진 것 중에 최고야. 하늘이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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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페드라> 1962 _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Goodbye John Sebastian”
그리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페드라 신화’를 모티프로 한 영화인데요, 국내에는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어요. ‘새엄마와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너무 자극적이라 판단해 새엄마가 아버지의 애인으로 설정되고 사랑을 나누는 장면(정말 노골적이지 않으면서 가장 섹시한 정사 씬이 아닐까..)이 삭제되는 등 서사가 엉망이 되었죠.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유명한 엔딩씬의 음악을 먼저 듣게 되었어요.
mbc 라디오 ‘배유정의 영화음악’에서 종종 이 음악을 틀어주었는데, 주인공 알렉시스 역을 맡은 안소니 퍼킨스가 절규하며 시를 읊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그 생생한 울부짖는 소리가 음악과 함께 어찌나 강렬하게 퍼지는지요. 새벽 2시에 시작하는 심야 라디오였는데, 심장이 요동치고 온몸의 세포가 쿵쾅거리면서 알렉시스의 고통과 절규가 고스란히 전해졌답니다. 사랑에 빠진 자기 아들과 아내의 관계에 분노한 아버지 타노스가 아들 알렉시스를 정신없이 때리고, 알렉시스는 페드라의 사랑을 뿌리친 채 스포츠카를 타고 그리스 해안 절벽을 미친듯이 질주하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다가 마주 오는 대형트럭에 의해 절벽으로 추락해 사망하게 됩니다. 영화 <언더그라운드>와 더불어 최고로 강렬한 엔딩 시퀀스라 생각합니다. 함께 감상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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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뮤직에서 전 곡을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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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슬러 르귄의 말을 인용하자면, 달리아를 심었는데 가지가 튀어나오기를 기대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쓰기 위해 연재를 결심했어요. 단순히 이거에요. 우리는 모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침묵으로 남고 싶지 않다는 거요. 저의 글이 조금이라도 좋았다면, 그것은 당신 안에 있던 무언가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서로 주의 깊게, 다정하게, 마음을 나누고 있음을 느껴요. 세상에 별처럼 무수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여행들을 위하여.
_ 덧붙여, 필명인 '우점'은 저의 할머니 이름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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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Jeom 우점
주간 산문시 <보이지 않는 여행들> 딜리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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