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다시 태어났다는 꿈을 꾼 직후부터 할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많은 여행을 했다. 유대 율법가의 예언을 청하고, 타이중의 유명 라마 점술가로부터 방위를 받았으며, 사무치는 참회와 처절한 기도의 촛불은 천 일이 넘도록 꺼지지 않았다. 오랜 노력 끝에 알게 된 몇 가지가 있다. 할머니는 여러 존재로 흩어져 태어났으며, 그중 일부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갔다. 현재 포유류와 미생으로 태어나 지구 곳곳에 산다. 할머니를 다시 찾고 싶은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애착과 비애 가득한 죄의식의 힘이 나를 이끌었다. 이윽고 나는 바다와 산 너머 험준하고 먼 땅을 걷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구원할 것이다.
붉은목도리여우원숭이
할머니는 높이가 45m에 달하는 뾰족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유인원으로 발견되어 숲연구원들의 극진한 보호 속에 있었다. 한때 할머니는 마다가스카르에서 공격성이 전무한 동족들과 함께 과일을 따 먹고, 작은 동물을 잡아먹으며 평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수박 만 한 크기의 엉덩이와 검고 긴 꼬리에서 할머니의 흔적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찾던 붉은목도리여우원숭이라고 확신하기 어려웠다. 철퍼덕. 순간 내 어깨로 어떤 뭉치가 떨어졌다. 엄청난 높이의 나무에서 떨어진 덩어리는 내 어깨를 부숴버릴 뻔했다. 할머니의 설사였다. 사람들은 장내 세균에 감염된 원숭이가 더는 생존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의 똥은 숲의 생명력이기도 했다. 마다가스카르 고유 식물의 수분을 돕고 데인트리가 드높게 자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원숭이가 되어 똥으로 세상을 비옥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여생을 숲에 맡기기로 했다. 할머니는 숲이 될 것이다.
꼽등이
놀랍게도 할머니는 꼽등이로 태어나 우리집 화장실 서랍장에 살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습기와 어둠으로 초대장을 만들고 따뜻한 미풍으로 공간을 뿌옇게 장식했다. 깊은 여름밤 모습을 드러낸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는 것인지, 본인 몸 길이를 훌쩍 넘는 더듬이를 현란하게 움직였다. (꼽등이 눈이 없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 알았다) 나는 할머니의 안락한 여생을 위해 부드러운 집게로 미리 준비한 안전한 집에 옮겨 놓을 작정이었다. 거대한 진동에 놀란 할머니는 온 힘을 다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정해진 방향 없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래봤자 내 무릎 높이도 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집게 대신 투명한 플라스틱 통을 씌워 할머니를 구하려고 했다. 근데 아뿔사. 통을 할머니 몸에 덮는 순간 다리 끝부분이 입구에 걸리고 말았다. 다리는 단숨에 분리되었고, 충격을 받은 몸통은 기절했다. 나는 해체된 할머니의 몸을 조심스럽게 모아 땅에 묻어 주었다.
범고래
할머니 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포말이 소용돌이치다 고요해지고, 이내 커다란 숨소리가 차올랐다. 나는 수면 위로 올라온 범고래 떼 중에서 단번에 할머니를 알아보았다. 할머니는 강인한 몸통으로 수면에서 튕겨오르고, 부드러운 휘슬음을 내며 내게 신호를 보냈다. 사람들은 내게 범고래가 나타나는 바다에 어슬렁거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경고했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할머니는 동료들과 함께 끽끽- 휫휫- 거리는 소리를 주고받더니, 해안에서 일광욕을 하던 바다사자를 둘러싸고는 파도 안으로 몰아부쳤다. 그리고 마치 통돌이 세탁기처럼 바다사자를 파도의 구멍으로 집어 넣고는 빙빙 돌렸다. 범고래의 육중한 몸들은 파도의 힘을 이용해 바다사자를 공처럼 주고받았고, 무력한 바다사자는 이내 정신을 잃고 그대로 먹이가 되었다. 나는 먼 곳에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 풍광을 오래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동료들과 가볍게 점프 세러머니를 한 후 깊은 바다로 사라졌다. 푸른 바다에 선명한 붉은색 너울이 불타오르며 넘실거렸다.
진드기
땡볕의 풀숲에서 할머니는 오래 굶주렸다. 할머니는 오로지 피를 섭취할 수 있는 포유류의 몸이 지나가기만을 화석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강아지와 새들이 풀을 씹어먹고 몸을 수풀 속에서 흔들어도 할머니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생전에 채식만 하셨고, 허리가 꼿꼿했으며 나누는 삶을 살았다. 돌아가시던 해에는 병이 깊어져, 본인의 과거를 잊었다. 갑자기 고기와 우유를 먹으며 “왜 너네만 맛있는 거 먹어!” 소리치곤 했는데, 그것도 애틋한 기억이다. 나는 다른 존재에 기생해야 하는 진드기 몸이 된 할머니 삶에 다시 품위를 주고 싶었다. 나는 내 피를 뽑아먹도록 몸을 내어주기로 했다. 진드기는 1초당 자기 몸길이의 320배까지 달려가는 게 가능하지만, 할머니는 우물쭈물했다. 내가 한참 머물자 드디어 결심한 듯 내 정강이를 향해 나선으로 마술처럼 달려왔다. 할머니는 내 정강이 살에 머리를 꽂아 넣기를 시도했다. 그러다 동작을 멈추더니 놀란 듯 번개처럼 튀어 올라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나를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뜨거운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몸은 순식간에 바짝 말라비틀어졌고,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판다
판다보호구역에 살고 있는 판다는 모두 18마리였다. 각자 개성 있는 재주로 사랑을 듬뿍 받는 슈퍼스타였다. 대부분은 짝짓기나 야생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그저 사육사에게 땡깡을 부리거나 방문객의 환호를 배경 삼아 앞구르기를 하거나 나무에 복슬거리는 몸을 기대고 종일 잠을 잤다. 잠에서 깨면 대나무를 씹어 먹으며 귀엽게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의 유일한 일과다. 3살 된 청년 판다부터 20년을 산 노년 판다까지 다양한 나이의 판다가 어울려 평온하게 살고 있었다. 나는 허리는 꼿꼿하지만 작고 단단한 판다가 할머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름은 로우베이였다. 로우베이는 18마리 중에서 가장 키가 작았지만, 풍선처럼 둥글둥글한 몸통은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로우베이는 맛있는 과일 간식이 눈앞에 있어도, 동료 판다가 원하면 간식을 모두 내어주고 둥근 몸을 굴리며 혼자 놀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려 애쓰지 않고, 음식에도 욕심이 없었다. 그저 손을 잡아주고 나무 그늘 사이에서 낮잠을 즐겼다. 나는 가까이에서 할머니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노래인 ‘봄날은 간다’를 틀어주었다. 할머니는 앞구르기와 뒤구르기를 연속해서 보여주고는 '우어엉' 하며 작은 소리를 냈다. 할머니는 행복해 보였다.
불개미
땅과 땅 사이를 수호하며 한 줄로 질서 있게 집을 옮기던 불개미들을 보았을 때 나는 할머니를 바로 알아보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물길을 만났을 때 불개미들은 기꺼이 몸을 겹겹이 쌓아 다리를 만들었고, 그중 물과 가장 가까운 곳에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스스로 부력을 만들어 동료들이 물에 잠식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다른 동료 개미들과 한 몸으로 똘똘 뭉쳐 길을 만들었다. 할머니와 그의 동료들은 다리를 무사히 건넜지만,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후였다. 할머니의 대퇴골은 틀어지고, 정강이가 크게 다쳤다. 바로 동료 개미 한 마리가 다가와 할머니의 대퇴골을 씹어 망가진 다리를 제거했고, 정강이의 상처를 입으로 깨끗이 씻어주었다. 나는 개미의 협력과 치료에 감응을 받았고, 어떤 위기가 바로 기다리고 있는지 예측하지 못했다. 털실처럼 뭉친 개미떼가 안전한 땅에 도달했을 때,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나뭇가지로 개미집을 쑤시고 발바닥으로 무자비하게 밟았다. 말릴 틈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고난을 겨우 이겨낸 할머니는 꿈틀거릴 틈도 없이 다시 납작하게 소멸했다.
나는 할머니가 인간의 몸을 얻지 않은 이상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인간으로 태어난 할머니의 다른 몸을 계속 찾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