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그들을 정확히 본 적 없어요. 하지만 그들은 어디에나 있죠. 지금도 어디선가..”
“어디선가…?” 나는 입술을 따라가며 되물었다.
“그들은 어디선가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제주도 동쪽에 도착해 1시간을 걷다가 겨우 만난 행인이 대답했다. 동쪽의 유일한 양지 마을인 삼달리에 와있다. 나는 지난 4개월간 해가 뜨지 않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의 외딴 오두막에 있었다. 정확히는 스피츠베르겐섬 뉘올레순에 3평도 되지 않은 작은 방에서 플랑크톤의 발광 능력을 에너지로 변환하는 연구원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첫 해가 떠오르는 날, 나는 새벽이 되자마자 짐을 챙겨 서둘러 섬을 빠져나왔다. 첫 태양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열두 명 중 한 사람은 밝음을 쫓다가 사팔눈이 되었고, 한 사람은 환청에 시달리다 지난 해 죽은 아이를 찾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내가 돌보던 개가 죽자 자주 울부짖었다.
나는 오랫동안 태양을 보지 못했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다가 발목을 심하게 접질린 기억 때문에 걸을 때마다 주춤거리는 후유증을 얻었다. 어떤 순간에는 말을 심하게 더듬거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일주일 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제주도에 백향과가 열리는 여름이 오면 온 세계 사람들이 동쪽 인간들을 만나러 뉘올레순같이 먼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혹은 육지에서 배를 타고 모여든다는 제보가 있었다. 나는 취재를 핑계삼아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는 그들을 만나면 내 발목이 더이상 주춤거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는 갈 곳이 없고.
하지만 소문만 떠다닐 뿐, 수 시간을 돌아다녀도 그들을 알고 있다는 사람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행인은 급기야 증명할 수 없는 소문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 ;
그들은 종종 담벼락에 둔 노각을 가져가요 / 바람이 불면 그들이 소리를 보낼 거예요 / 가끔 모래 아래에 있어서 잘 들춰봐야 해요 / 매 순간 얼굴이 바뀌어요 / 그들인 줄 알고 간다면, 그들이 아닐 거예요 / 보름달을 닮았어요 / 많이 먹어요
“전 그들을 만나러 먼 곳에서 왔습니다. 저를 그들에게 안내할 수 있나요?”
난 지쳤다는 듯이 눈을 끔뻑거리며 사정했다.
“무밭 담벼락을 따라 가다가 실개천과 대나무숲을 건너야 하죠. 검은색 지붕이 보일 거에요. 그 먼집을 지나 안쪽으로 쭉 들어가세요. 사람들은 내게 이런 부탁을 하곤 하지만 난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내가 말해주었다는 것은 비밀입니다! 이만 떠나야겠습니다.”
“잠시만요,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어떻게 알아보죠?”
“소리가 불어올 겁니다.”
나는 돌담을 찾지 못해 세 바퀴를 돌다가 무밭에 겨우 이르렀다.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던 까닭에 망연자실하다가 무의 모양이 너무 제각각이라 웃음이 터졌다. 어떤 것은 축구공처럼 둥근데, 어떤 것은 어른 허벅지만큼 둘레가 크고 자갈 같은 혹이 제멋대로 붙어 있었다. 비옥한 붉은 흙에 흩어져 있는 못생긴 무 사이로 꿩 한마리가 날아올라 화들짝 놀랐다. 그것은 검은 담벼락에 앉아 있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쉬다 날기를 반복하더니 끝내 사라졌다. 꿩의 붉은 꽁지 자락을 따라 실개천을 건넜고 대나무숲을 지나쳤다. 이따금 눈이 따가울 정도로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바람 소리인지, 대나무 소리인지, 무수한 소리가 이어졌다.
록. 록. 록. 혀를 입천장에 튕기는 소리, 뱀이 바위를 긁고 가는 소리, 아이가 사탕을 깨무는 소리, 거미가 이슬을 쪼개는 소리, 벌이 번개를 일으키는 소리, 버섯이 흙을 밀어 올리는 소리, 아비가 마지막 숨을 넘기는 소리, 할머니가 잣죽을 끓이는 소리, 고함 원숭이가 짝을 찾는 소리, 박테리아가 산소를 터뜨리는 소리, 해파리가 촉수를 박차는 소리, 제비가 벌의 냄새를 맡는 소리, 빙하 협곡이 갈라지는 소리, 아비가 바둑알을 던지는 소리, 아기가 젖을 찾는 소리, 사슴의 마지막 숨소리, 우물에서 물이 솟구치는 소리, 씨앗이 움트는 소리, 진드기가 공중제비하는 소리, 무리 잃은 개미의 헛발질 소리, 빗물이 땅에 스미는 소리, 아가미가 닫히는 소리, 폐가 심장을 감싸는 소리, 숨이 엄지발가락으로 흐르는 소리, 고통이 녹아내리는 소리, 호랑이가 나를 이끄는 소리, 슬픔이 새어나가는 소리, 어미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소리, 공간이 늘어나는 소리, 수평선이 이동하는 소리, 고래가 작살을 피하는 소리, 사람을 판단하는 소리, 생명을 돌보는 소리, 새끼를 부르는 학의 우렛소리, 사랑이 일어나는 소리,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 신이 우는 소리...
나는 현기증이 나서 숨을 헐떡거렸다.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았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문제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불투명한 경계 속에서 무엇인가 나를 쓰다듬고 밀어 들어 올리는 촉감을 느꼈다. 그것은 사방에서 밀려왔는데, 마치 파도의 물결에 휩싸인 것처럼 앞뒤 위아래로 너울댔고, 해일처럼 빠져나갔다가 다시 내게 세게 밀려와 부딪히고 부서졌다. 순간 벌거벗긴 채 망망대해에 떠 있는 것처럼 엄청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새우처럼 웅크렸다. 그러자 코가 달린 몸이 옆구리를 지그시 누르며 씰룩거렸다. 그것은 우울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긴 코를 친구의 입 속에 넣는 아시아코끼리였다. 말랑말랑한 코가 내 몸을 어루만지고 입 속에 들어왔다. 그리고 콧김이 말했다.
“나는 당신을 지지합니다. 나는 당신의 뼈를 지지하고, 폐를 지지하고, 심장을 지지하고, 췌장을 지지하고, 횡격막을 지지하고, 충수를 지지하고, 비장을 지지하고, 혈관을 지지하고, 골수를 지지하고, 호흡을 지지하고, 흔들리는 동공을 지지하고, 뒷공간을 지지하고, 옆 시선을 지지하고…… 주춤거리는 발목을 지지합니다.”
말은 미지근한 온풍이 되어 몸의 장기를 잔잔하게 흔들고, 먼 곳에서 겁 많은 큰 개가 허공을 향해 두 번 짖었다. 미래의 소리처럼 아득한 동시에 안전함을 느꼈다. 콧김은 눈두덩이를 지그시 누르고 발목으로 고요하게 떨어졌다. 나는 검은 돌에 얼굴을 파묻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따뜻했다. 나는 돌 속에서 나를 기쁘게 배웅하는 뉘올레순 사람들을 보았고, 흰수염이 근사한 큰 개를 쓰다듬었으며, 태양 축제를 여는 사람들과 원형 춤을 추었다. 느리게, 빠르게, 사라지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열흘이 흘러가 있었다.
이제는 이곳이 어디인지, 그들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지지를 얻었다.